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사자성어를 알지? 운이 칠할이고 재주나 노력이 삼할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일은 재주나 노력보다 운에 달려 있음을 이르는 말일세.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열심히 노력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성골할 수 없다는 뜻이야. 너무 운명론적이라고? 이 사자성어가 나오는 중국 청나라 포송령(蒲松齡)이 쓴 ‘요재지이(僥齋志異)’라는 책에서 옥황상제는 매우 열심히 공부했지만 매번 과거에 낙방한 게 억울해서 그에게 따지러 온 나이든 선비에게 다음과 같이 꾸짖지. "세상은 정의대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운명의 장난이라는 것도 꼭 따르는 법이다. 그래도 3할은 실력과 이치가 결정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운명이 전부는 아니니 포기하지 말고 더 열심히 노력해보라는 거야.

‘운’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 난 운이 우리들 삶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야. 먼저 맹문재 시인의 <운(運)>을 읽어보게나.

이력서를 낸 곳에 시외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 면접 보러 가는 길/ 내 이마를 툭 치는, 그것// 내게 한마디 하려고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나는 비로소 그것이/ 들판 그득하게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살아 있는 것도/ 새들과 함께 날아오르는 것도/ 도랑물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보았다// 그것, 꽉 쥐고 있자니/ 어느새 내 손바닥은 눈물로 흥건하다

시인은 ‘운’이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고 나뭇가지에도 파릇파릇 살아 있다고 하네. 새들과 함께 날아오르기도 하고 도랑물을 타고 흘러간다고도 해. 이 세상을 운이 채우고 있다는 뜻이야. 물론 그런 운을 자신의 ‘행운’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고, 운이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지. ‘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많고. 어쨌든 그런‘운’을 놓치지 않으려고 꽉 쥐고 있으려니 “어느새 내 손바닥은 눈물로 흥건하다”고 탄식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가엾고 애처롭기만 하네.

그런데 왜 고리타분한 운(運) 이야기냐고? 이번에 새로 나온 마이클 센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를 읽으면서 서양 사람들도 ‘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내심 놀랬기 때문이야. 센델 교수가 누구인가? 몇 년 전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 사회에 ‘정의’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미국 하버드대 교수 아닌가. 그런 세계적 석학이 내가 평소에 자주하는 “운이 있다는 걸 믿는 사람은 누구나 겸손해진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센델 교수는 원제가 ‘The Tyranny of Merit’인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비례해서 보상을 해주는 사회시스템인 ‘능력주의’가 미국에서 지난 40여 년 동안 부자에게는 휴브리스(hubris)에 가까운 오만을, 패자에게는 모멸감과 절망을 가져다주는 식으로 쌍방향 폭정을 휘둘렀다고 비판하고 있네. 능력주의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 공동체가 황폐해졌고 그 결과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거지. 이른바 ‘트럼피즘(Trumpism)’이 능력주의 폭정의 부산물이라는 거야.

그래서 센델 교수는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며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오만을 버리고, 그 대신 “우리 운명은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 없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된다”고 생각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네. 우리들의 삶에서 타고난 재능이나 노력 못지않게 운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인정해야만 승자가 오만해지지 않는다는 거지. 어느 분야든 정상에 오른 사람이 자신의 성공이 자신만의 힘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라고 여기면 겸손해 질 수밖에 없네. 왜냐고? 자기와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도 자기와 엇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운이 나빠서 실패한 거라고 생각하면 패자에게도 관대해지거든. 그래야 성공의 대가를 그런 패자들과 기꺼이 나누려는 마음도 생기는 거고.

운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겸손한 것은 사실일세.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 했던 말이 생각나네. “내가 만약 다른 나라나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아마 어떤 동물의 점심거리였을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그래서 이런 행운의 상당 부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맞는 말 아닌가? 운이 좋게도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미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서 ‘투자의 귀재’라는 칭송을 들어가면서 큰 부자가 되었으니 그 부와 명예를 혼자 독차지하지는 않겠다는 거지. 빌 게이츠(Bill Gates)도 한 인터뷰에서 “나는 운이 참 좋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세상의 불평등을 줄일 책임이 있다. 이는 일종의 종교적 신념이며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이다”고 말한 적이 있어. 이런 세계적 부자들의 말과 행동을 부자 아버지를 둔 행운만으로 천문학적인 부를 물려받은 우리나라 재벌 후계자들이 귀담아 듣고 실천한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더 밝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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