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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의 늦은 수다] 샛길 말고 새길
[정숭호의 늦은 수다] 샛길 말고 새길
  • 정숭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2.0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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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숲세권’이라는 말이 정말 어울리는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아파트 바로 뒤가 산입니다. 현관을 나와 300걸음쯤 걸으면 참나무 상수리나무 밤나무 잎사귀가 수북이 쌓인 산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가파르지 않은 흙길을 따라 40분가량 올라가면 세상에서 가장 맑은 소리라는 돌 위에 물 흐르는 소리, 그 옆 숲에서는 새소리 예쁘게 들리는 약수터도 있습니다.

나무는 울창하고 나뭇가지 사이로는 늦가을 오후의 황금빛 햇빛이 꿈처럼 빛납니다. 고요와 평화만이 그윽한 이 길을 걸으면 좋은 생각, 새로운 깨달음, 잊었던 추억이 몽글몽글 살아나 나 자신이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고 삶의 의욕도 더 충만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 속이 좁은가, 사람들이 안 다니는 곳으로 산에 오르는 사람을 보면 산속에서 얻은 마음의 평화가 흐트러집니다. “샛길이 또 생기겠구나”라는 걱정 때문입니다. 샛길로 오르면 더 빨리 편하게 약수터까지 갈 수 있지만, 나는 산이 망가지는 게 두렵고 걱정돼 원래 다니던 길로만 걷습니다. 그러면서 샛길을 낸 사람들, 샛길로 가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비웃습니다.

실제로 10여 년 전 이사 왔을 때는 한 가닥뿐이었던 이 길 옆에 여기저기 샛길이 새로 많이 났습니다. 동네에 아파트가 더 들어서며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겠지요. 새로 난 샛길들은 고작 30~40미터일 뿐이고, 갈라지는 곳에서 다시 합쳐지는 곳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단지 좀 더 빨리, 더 편히 가고자 만들었겠지만 빨라봤자 몇 십 초, 편해봤자 미리 만날 오르막을 약간 뒤로 미룬 것일 뿐입니다. 운동하러 왔으면 몇 걸음이라도 더 걷고, 일부러라도 힘들여 오르는 게 더 좋으련만 그들에게는 여기서도 앞서가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제치고, 남보다 편하게만, 먼저 오르려는 경쟁심만 발동하나 봅니다.

보통 새로운 길을 낸 사람은 존경받고 본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산속 오솔길 옆에 샛길을 낸 사람은 그저 자기 편하기 위해, 자기 혼자 빨리 올라가기 위해 길이 없던 곳을 밟아댔을 뿐이기에 나는 그들을 비웃고 원망하는 겁니다. 이런 길은 아무리 새로 나도 ‘새길’이 아니라 ‘샛길’이며, 이때 ‘샛길’은 ‘얍삽한 길, 치사한 길’ ‘새치기의 길’일 뿐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런 길은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개척자의 숭고한 길, 창조의 위대한 길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고’로 끝나는 로버트 프로스트 시 ‘가지 않은 길’도 행여 이곳에서는 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세 갈래 길을 만난 앨리스가 어느 길을 택할지 망설일 때 고양이 체셔가 나타나 “어디로 가고 싶은데?”라고 묻습니다. 앨리스가 “모르겠어”라고 대답하자 체셔는 “아무 길이나 골라. 목적지를 모르면 어느 길이나 마찬가지야”라고 말합니다. 이런 멋진 교훈도 우리 동네 뒷산 오솔길에 생긴 세 갈래 길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빤하기 때문입니다. 능선 끝에 있는 약수터이거나, 약수터부터 가팔라지기 시작하는 고개 끝에 오르면 나타나는 정상이 이 산에 오르는 대부분 사람들의 목적지이지요.

우리 동네에는 여전히 새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동안 들어선 것까지 합하면 아마 4,000~5,000가구가 늘어난 셈입니다. 샛길도 더 생기겠지요. 이미 겪은 것처럼 ‘나 홀로 개척자’, ‘어줍잖은 선두주자’가 부족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논어에 ‘욕속부달(欲速不達)’이라는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빨리 가겠다고 욕심내면 도달하지 못한다”는 뜻이랍니다. 논어 말씀을 나에게 알려준 분은 “설령 샛길로 가서 목표에 도달한들 반칙으로 간 것이니 도달하지 못한 거로 봐야한다”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산에 가서 외치고 싶습니다. “이봐요, 샛길로 가시는 분들, 당신네는 이미 반칙을 저지른 거라고요!”

“샛길은 많으니 이제 그만 만들고 새길 만드는데 힘과 정성을 쏟아주세요”라고도 외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