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안갯속이다. 2021년 새해를 맞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문재인 정부는 구체적인 대북접근 구상을 선보이지 않고 있고, 주변국들도 무관심에 가까운 관망 수준이다. 북한도 침묵하며 내부 추스르기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런 흔치 않은 광경은 표면적으로는 코로나19 사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북한과 미국·중국 등 국제사회가 코로나19 퇴치를 위한 방역 및 백신 확보 등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북핵이나 한반도 평화 이슈 등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보건·환경 등 인간 안보 혹은 새로운 차원의 위협에 대처하느라 핵이나 도발 억제 같은 전통적 안보 위협 요소들은 뒷순위로 밀린 양상이다.

미국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새롭게 출범한 상황 변화도 이런 국면을 초래한 결정적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면서 그가 추진한 북한 비핵화나 북미 관계 진전을 위한 프로세스는 일순간에 모멘텀을 상실했다. 

바이든 대통령이나 미국의 새 행정부가 대북정책에서 트럼프적인 요소를 계승하거나 일부라도 가미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웬디 셔먼 부장관 등 대북·한반도 관련 라인의 인선결과를 놓고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오랜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은 연일 ’새로운 전략‘을 강조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의기투합이나 개인적인 친분·신뢰관계의 과시로 정상회담 이벤트 등을 펼치던 트럼프식 접근법은 더는 유효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다.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으로 트럼프식의 대중 압박이나 첨예한 미·중 갈등은 수그러들거나 통제 가능한 수위조절이 이뤄질 것이란 기대가 있지만 장담하긴 일러 보인다. 미국이 여전히 시진핑 체제의 중국에 대해 불신과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고, ‘민주주의 질서’를 해치는 중국의 행동에 단호하게 대처할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다. 

바이든이 야심차게 구상 중인 ’글로벌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이런 미국의 입장을 투사하는 장이 될 공산이 크다. 중국은 이에 맞서 오는 7월 공산당 창당 100주년 행사를 중국의 강화된 역량 과시와 반미 연대·공조의 계기로 삼을 게 분명하다. 미중의 세력 대치 속에 여타 국가들을 자기 쪽으로 줄 세우려는 경쟁과 압박은 커질 수밖에 없고, 각국의 셈법 또한 복잡해질 전망이다.

한때 한반도 이슈의 중심 행위자 역할을 했던 북한은 유달리 잔뜩 움츠린 모습이다. 미국이 대선을 치른 지 석 달이 됐지만, 북한 관영 매체들이 당락에 대한 제대로 된 보도나 논평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건 바이든 시대를 맞는 김정은 체제의 고심을 엿보게 한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새 대미·대외 전략의 돌파구 마련에 실패했고, 문재인 정부와의 대화나 교류도 차단했다. 코로나19 사태에 경제 정책의 좌초까지 겹치면서 깊은 수렁에 빠진 형국이다.  

연초 8일간에 걸쳐 개최한 노동당 8차 대회도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정은의 당 직책을 당 위원장에서 총비서로 바꾸고, 정무국 체제를 비서국 체제로 전환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절의 시스템에 변화를 가했으나 별무소득이란 판단으로 집권 10년 차를 맞아 다시 회귀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다. 

잦은 정치 이벤트로 안팎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군사퍼레이드를 통해 김정은 위상 강화와 체제결속을 호소하는 수준에 머무는 양상도 김정은 체제가 경제정책을 위시한 대내 통치에서 창의적 생존전략을 모색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국면에서 남북관계의 진전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이행을 추진해야 하는 문제인 정부로서는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북한의 잇따른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도발 속에서도 유화적 대북접근의 원칙을 고수해 결국 북한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테이블로 유도했던 2018년의 ‘아름다운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것이란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상실감은 더할 것이다. 

미중 사이에서 어떤 전략적 선택을 통해 한국의 외교적 공간을 유지·확장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복원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임기를 1년 남짓 남겨둔 현 정부의 최대 고민거리라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 고위관료들에게 던지고 싶은 첫 번째 권고는 ’서두르지 말라‘는 점이다. 

남북관계의 돌파구 마련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정부 안팎에서 대북 조급증이 감지된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해 11월 코로나19 백신의 대북제공을 언급한 데 이어 정세균 총리가 1월 27일 “코로나 백신이 남는다면 북한에 제공할 수도 있다”고 밝힌 게 대표적 사례다. 

북한은 ’코로나 청정국‘을 자처하고 있고, 한국을 ’적(敵)‘으로 칭할 정도로 대남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 적절한 수준의 소통이나 북한의 감정 추스르기 절차가 없는 상황에서 돌출되는 서울발 대북지원 발언은 북측의 감정만 상하게 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8차 당 대회 연설에서 코로나 협력 등을 ’비본질적인 문제‘라고 규정한 대목도 곱씹어 봐야한다. 자칫 북한의 감정만 더 상하게 하고, 우리 국민에게는 ’퍼주지 못해 안달하는‘ 정부로 비치는 하책으로 전락할 수 있다.

둘째는 ’주는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적 차원의 남북협력이나 대북지원에는 북한의 체면을 살려줄 적절한 명분이 필요하다. 과거 정부에서 대북 식량 지원이 북한의 수해를 계기로 논의되거나,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테이블에 올려 논의해온 건 이런 점을 고려해서다. 

우리 한민족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좋은 전통을 갖고 있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면서까지 건네는 시혜적 조치에는 거부감을 보이는 정서를 갖고 있다. 코로나와 대북제재까지 겹쳐 ’먹는 문제의 해결‘을 최고지도자가 공개연설에서 꺼내야 하는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 여유롭고 풍족한 대한민국에 대한 열패감은 클 수밖에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남조선 것 받지 말아라“고 지시했다는 말이 북측의 대남 관계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지혜롭고 현명한 ’주는 기술‘이 뒷받침돼야 제대로 된 대북지원이나 협력의 문이 열릴 수 있고, 북한 엘리트와 주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보다 더 많이, 더 의미 있게 줄 수 있는 기술과 북한의 ’받는 매너‘가 어우러질 때 지금과 같은 남북 간의 서먹한 관계는 해빙을 맞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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