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달라진 게 없다. 계획을 낮게 세우고 연말에 가서 초과 수행했다고 평가받으려 하지 말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짜증 섞인 질책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월 초 노동당 8차 대회를 소집해 민생문제 해결과 각 부문별 과업을 수립·점검한 김정은 위원장은 일이 제대로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고삐를 더 바짝 조이고 있다. 당 대회 개최 다음 달 곧바로 노동당 전원회의를 개최해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농업 분야는 현실성 없는 계획을 세워 허풍을 떨고 있고, 전력·건설 등 담당 부처에서는 비판과 처벌을 우려해 아예 계획을 낮게 잡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게 김정은 위원장의 지적이다. 당 대회에서 임명된 김두일 노동당 경제비서 겸 경제부장을 전격 해임하고 후임에 경제부총리 출신 오수룡을 앉혔다.

이런 모습은 김정은 위원장의 ’농구감독‘ 스타일 리더십을 보여준다. 선수의 경기 운용 능력이나 컨디션, 순간순간의 흐름을 반영해 수시로 선수를 넣었다 빼는 농구 경기의 특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임용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당 경제 비서를 교체한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김정은의 어린 시절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내용이다. 김정은이 친형 김정철과 각각 팀을 맡아 농구경기를 치렀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경기를 마치면 ’수고했어‘ 하며 그대로 팀을 해산시키던 김정철과 달리 김정은은 잘한 점과 잘못된 점을 꼼꼼히 짚고 지적한 뒤 헤어지고는 했다“고 썼다.

김정은 위원장의 질책과 간부에 대한 즉흥적인 문책성 교체가 이어지자 평양의 관료사회에는 비상이 걸렸다. 시범이나 본보기로 꼽힐 경우 자칫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관영 매체엔 이들의 반성문이 줄줄이 등장하고 있다. 내각 부총리 양승호는 2월 13일 자 노동신문에 “우리 경제지도 일꾼(간부)들이 보신주의·패배주의적 관점을 송두리째 뿌리 빼지 못하고 아직도 어려운 조건과 환경의 포로가 되어있다”고 밝혔다. 마종선 화학공업상은 “소극적인 사고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을 운운하면서 작전을 통이 크게 펼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노동신문 등 관영 매체는 “비상한 자각을 안고 당 대회 결정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연일 내보내고 있다.

간부들의 ’일뽄새‘(업무에 임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북한 표현)를 질타하고 경고하는 글도 이어진다. 노동신문은 2월 24일 자 사설에서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애로가 제기되면 국경 밖을 넘보거나 위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생산·연구·개발 단위를 찾아가 긴밀한 협조 밑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경 밖을 넘보지 말라“는 것은 경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외부의 원조에 기대거나 더 나아가 개혁·개방이나 서방의 자본주의적 시스템에 대해 환상을 갖지 말라는 경고다. 

대북제재와 코로나19, 자연재해 등으로 북한 체제가 경제를 중심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자칫 위기로 치닫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간부들에게 자력갱생의 정신과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경제 문제와 관련해 눈살을 찌푸린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으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던 2018년 여름에는 평양은 물론 지방 단위의 간판급 공장과 기업소 등이 직설적인 김정은의 질책에 벌벌 떨었다. 

평안북도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마구간 같은 곳에 현대식 기계를 들여놓았다“고 질책했다. 당 간부들을 향해서는 ”숱한 단위들에 나가보았지만 이런 일꾼들은 처음 본다“는 격한 말도 쏟아냈다. 함경북도 어랑천발전소 현장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은 ”도대체 발전소 건설을 하자는 사람들인지 말자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며 부지하세월인 건설 공정에 불만을 터트렸다.

집권 초 경제문제의 해결을 공언했던 김정은 위원장은 이 문제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자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집권 5개월 만인 2012년 4월 김일성광장에서 이뤄진 첫 공개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꼭 필요한 경제가 풀리지 않자 일이 꼬여버렸다. 전례 없이 촘촘한 대북제재는 북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해제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한국 정부로부터의 경협이나 대북지원 확보도 제재의 벽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퇴진과 바이든 행정부 출범으로 북한에게는 다시 쉽지 않은 시절이 돌아왔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을 드러내 온 북한은 서울과 냉랭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경제 문제가 풀리지 않는 데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고민이나 불편함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핵이나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따라 북한 주장대로 ’군사 강국‘을 이뤘다고 하지만 여전히 주민의 40%가 식량 조달에 문제를 겪고 있다는 국제기구의 조사결과는 북한 경제의 현실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과 핵을 앞세운 북한 정권의 위상 과시 등 정치·외교적 측면의 ’성과‘를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민생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룰지도 모른다. 지난해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김정은이 보인 눈물이 그 징표일 수 있다.

하지만 노동당 대회를 통해 경제계획을 발표하고, 관료들에게 책벌과 숙청으로 그 이행과 사업방식의 개선 등을 압박하는 것만으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다. 북한 경제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데다, 근본적인 원인은 시스템이나 제도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 운용의 절대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과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제 농구감독이 아닌 팀의 경기력 전반과 선수 개개인의 삶을 세세히 살펴 중장기적인 발전전략을 챙기는 구단주 같은 역할을 고민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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