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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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산에 갈 때마다 입고 가는 고어텍스 등산 재킷을 작년 말 3만 원 주고 샀습니다. 이거 입고 한겨울 북한산 도봉산을 일고여덟 번 올랐으니 본전은 벌써 뽑았습니다. 그런데 이거 싸구려 아닙니다. 정가가 57만 원으로 책정된 제품입니다. 중고도 아닙니다. 완전 신품입니다. 비닐 포장이 뜯기지도 않은 걸 사왔습니다. 메이커도 국내 3대 백화점 아웃도어 섹션에서 볼 수 있는 인지도 높은 회사입니다. ‘디자인’과 ‘핏’이 좋다는 뜻입니다. 그런 고급제품을 어떻게 그렇게 싸게 샀냐고요?

짜잔~~~! ‘캐롯마켓’에서 샀습니다. 캐롯마켓은 우리말로 ‘당근시장’입니다. ‘캐롯’은 ‘당근(몸에 좋다는 주황색 뿌리채소)’이지만 우리말 표기가 있음에도 캐롯마켓이라고 쓰는 이유는 혹시라도 이 글을 캐롯마켓 운영회사 홍보 글로 오해하실까봐서입니다.

이 마켓은 개인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데 무척 편리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가격도 매우 쌉니다. 그래서 이 마켓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급속도로 성장해 이용하는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홍보 글이 되는 걸 피할 수가 없네요. ㅠㅠ.) 지금 이 글 읽으면서 캐롯마켓의 존재를 알게 된 분들도 없지 않을 테니 아주 짧게 이 마켓 이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전화기에 이 마켓 앱을 받으세요. 그리고 팔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등록하면 되고, 사고 싶은 물건이 나왔으면 물건 내놓은 분에게 연락하면 됩니다. 자세한 이용법은 검색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용하기 어렵냐고요? ‘당근’ 쉽습니다! ‘캐롯마켓’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도 ‘당근’ 나옵니다.

이 마켓에 나오는 물건은 대체로 쓰던 것들이나, 새 물건도 꽤 많습니다. 중고는 ‘당근’ 싸게 나오지만, 포장도 뜯지 않은 신품이 중고보다 더 싼 것도 있습니다. 내 등산 재킷이 그런 경우이지요. 중고라고 해도 겨우 한두 번, 혹은 서너 번 쓰고 내놓은 것도 많아 잘 사면 그야말로 ‘득템’입니다. 가격은 파는 사람 마음대로라 내 등산 재킷처럼 57만 원짜리를 3만 원에 내놓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이사를 갔더니 비데가 있더라”라며 몇 해나 썼는지 모를 비데를 9만 원에 내놓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리하야, 우리 집에는 작년 말부터 캐롯마켓에서 구한 물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등산 재킷 외에 8만~9만 원은 줘야 할 등산 배낭 신품을 2만 원에 샀고요, 집 청소 담당자로서 몇 해 째 써온 외산 무선청소기의 흡입력이 점차 전만 못해지는 것에 불만이 있던 차에 엊그제 “흡입력이 장판도 뜯어낼 정도”라는 소개 글이 붙은 정가 26만 원짜리 국산 유선청소기가 나온 걸 보고는 즉각 연락해 10만 원 주고 사왔습니다. 판 사람은 딱 한 번 썼다고 하지만 겉에는 흠 하나 없고 먼지 통에도 먼지 한 톨 없는 ‘신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캐롯마켓에서 사고파는 아이템은 훨씬 다양합니다. 옷, 신발, 장난감, 화장품, 스포츠용품, 주방용구, 침구 등등 없는 게 없으며 심지어는 자동차도 나왔다고 합니다. 아내도 이것저것 산 것 같은데 어떤 아이템인지는 프라이버시 때문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아내가 쌀을 한 번 샀다가 밥맛이 좋아 또 사려했더니 쌀을 판 사람이 마켓에서 퇴출됐다는 이야기는 전해 드릴까 합니다. 여기서는 금지된 영리활동을 한 것이 퇴출사유입니다. 쌀을 판 사람이 농사를 짓던 분이었던지 자기 쌀을 여러 사람에게 ‘이문’을 붙여 팔다가 걸린 모양입니다.

이 마켓에는 공짜로 나온 물건도 많은데, 값을 아무리 낮춰도 안 팔리는 것을 폐기물 처리비용을 주고 버리기는 아까워 ‘무료 나눔’으로 내놓은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무료 나눔’으로 나온 걸 가지러 간 사람이 물건 주인에게 고맙다며 답례로 물건을 줬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다른 ‘무료 나눔’한 사람에게서 얻은 값싼 물건이었다나 뭐 그런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캐롯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판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재미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검색하면 다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실소가 나오는 것도 있고,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번지게 하는 글도 있습니다. 따뜻한 이야기 읽어보시려면 다른 매체에 난 글인데,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70091)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이제, 새것 혹은 새것이나 다름없는 걸 왜 싸게 파는지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 드리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캐롯마켓에 나온 새 물건은 선물 받았거나 사은품 혹은 원플러스원 제품들이라고 합니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는 창립기념일이나 설날, 추석에 직원들에게 선물을 주잖아요. 이미 같은 물건이 있거나 사이즈가 안 맞거나 자기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면 여기에 내놓는 거지요. 사은품은 공짜니까 단돈 천원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좋은 것이고, 원플러스원 제품은 한 개 살 돈으로 두 개 사서 하나를 팔면 공돈 생기는 기분이 들 것이고요. 내가 산 등산 재킷, 배낭, 유선청소기가 그런 상품들입니다.

그런데, 갖고는 싶었지만 제값 주고는 안 샀을 물건을 헐값에, 때로는 공짜로 구하는 재미로 캐롯마켓을 즐거이 이용하고는 있지만 집에 자꾸 잡동사니가 쌓인다고 생각하니 이젠 그게 걱정이 되고 있습니다. 나이 들면 물건을 버리라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건을 물려받고 싶어 하지만 전부 떠안는 건 원하지 않으니 잘 내다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데스 클리닝(Death Cleaning 죽기 전에 버리기)’이라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됐는데, 버리기는커녕 새로 모으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철들기는 아직 멀었나 봅니다. 내 모습이 우주궤도를 떠돌면서 쓰레기를 잔뜩 끌고 다니는 녹슨 우주선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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