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꽃 핀 이팝나무 그늘 아래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여 시를 읽었다. 꽃향기를 깊게 호흡하며 선생이 물었다. ‘생을 밀고 가는 힘은 무엇인가.’ 스무 살, 혹은 그 언저리인 학생들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했다. 첫 번째 학생이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학생의 답변을 듣고 선생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 번째 학생은 눈이 맑은 여학생이었다. 그 답은 첫 번째 학생과 같은 것이었다. 선생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세 번째 학생의 답 또한 같은 것이었다… 그날 오후 내내 선생은 술을 마셨다. 스무 살, 빛나는 청춘들이 이구동성으로 답변한 답을 혹 아시겠는지. 지혜도 사랑도 명예도 정의도 시도 아닌. 학생들의 대답은… 돈… 이었다.”

2004년에 발간된 『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의 엮은이 곽재구 시인이 한명희의 <이름이 그 남자를 밀고 간다>는 시에 붙인 글일세. 17년 전에 읽고 고민했던 화두가 다시 생각난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돈과(땅과 부동산) 관련된 문제들로 매우 시끄럽고 어수선하기 때문이야. 마치 예전에는 돈에 초연해서 살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악당의 등장에 놀란 것처럼 떠드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히기도 하고. 그래도 곽재구 시인이 저 글을 쓸 때는 배금주의에 너무 일찍 물든 ‘빛나는 청춘들’을 보고 자신이 뭔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아서 얼굴이 붉어지고, ‘그날 오후 내내’ 마음이 아파 술을 마셨던 선생이라도 있었네. 지금도 저런 교수님이 있을까? 몇 년 전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에 거세개탁(擧世皆濁)이 있었던 걸 보면 있어도 아주 드물 것 같네. 어디 교수뿐이겠는가? 우리나라의 중산층 이상 부자들 중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바르지 않다”는 저 사자성어 앞에서 떳떳한 사람이 몇이나 될지… 그런 분들은 수오지심이 뭔지도 모른다고?

거의 모든 게 상품화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살 수 있냐고? 물론 아니지. 먹고 사는데 돈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야. 다만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사회가 문제라는 거지.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많은 도구들 중 하나일 뿐이야. 그 외에도 우정, 사랑, 명예, 정의, 윤리, 예술, 생태계 등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도 많아. 그런데도 돈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한 사회, 부정이든 탈법이든 일단 부자가 되면 성공으로 인정받는 사회,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물신숭배사회, 공적 윤리나 의무보다는 사적 이익의 추구가 당연시되는 사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낯일세.

미국의 정치학자인 잉글하트(Donald D. Inglehart)는 한 나라가 어느 정도 부유해지면 돈이나 경제 등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생태나 예술 등 탈물질적인 가치들을 더 중시하는 사회가 된다고 했는데 우리는 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도 아직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되돌아보면, ‘모든 국민 성공 시대’를 외쳤던 분이 서울시장과 대통령을 하면서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돈이 지배하는 '속물의 시대'로 들어섰던 것 같네. 이명박은 과정이야 어찌됐든 경제적으로 성공만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전 국민에게 생생하게 보여준 모델이었어. 모든 국민들이 자기처럼 출세하라고 뻔뻔스럽게 ‘전 국민의 성공시대’를 외쳤지. 어느 분야에서든, 적법 불법 탈법 관계없이, 어떻게든 1등을 하는 사람들이 영웅으로 등극하고 존경 받는 시대가 열렸어.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부모들과 선생들이, 별 양심의 가책 없이, 자기 자식과 학생들에게 바보처럼 살지 말고 ‘법에 어긋나는 부정한 짓을 해서라도 꼭 성공하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살게 되었지.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윤리나 도덕은 패배자들의 자기변명 수단일 뿐이야. 온갖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들을 도덕적인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남이 잘 되는 꼴 두 눈 뜨고 못 보는’무능한 사람들의 꼬인 심성에서 나온 시기심일 뿐이니 신경 쓸 일도 아니야. 결과는 좋으면 다 용서 받는 세상이여.

요즘 이른바‘LH 사태’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네. 3기 신도시 개발 정보를 미리 알 수 있었던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해당 지역 땅을 사들여 막대한 차익을 얻으려고 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지. 게다가 LH 직원인 것 같은 사람이 익명게시판에“우리 회사만의 혜택이자 복지인데 꼬우면 니들도 우리 회사로 이직하든가”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으니… 임기 내내 부동산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문재인 정권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지. 공무원이나 공사 직원이 내부 정보를 이용해 투기하는 행위는 아무리 무거운 처벌을 한다고 해도 반대할 생각이 전혀 없네. 그런 사람들은 공무원이나 공사 직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존재 이유를 재정립했으면 좋겠네.

이제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볼 시간이네. 나는 정말 부동산 문제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살아왔는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투기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었을지 자꾸 묻게 되네. 나는 떳떳하냐고? 반백년 전 서울에 올라와 이사 딱 한 번 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네. 그러면 앞에서 곽재구 시인이 제기한 ‘생을 밀고 가는 힘’은 무엇이냐고? 나에게는 시와 음악과 꽃과 사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나를 밀고 가는 힘일세. 돈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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