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라는 부제가 붙은 여덟 권짜리 ‘김일성 회고록(사진)’이 이달 초 국내서 출판됐다.
‘세기와 더불어’라는 부제가 붙은 여덟 권짜리 ‘김일성 회고록(사진)’이 이달 초 국내서 출판됐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반공교육은 잘못됐다. 공산주의와 관련된 책은 비판서이라고 할지라도 절대 읽어서는 안 된다고 무조건 금지했기 때문에 ‘주사파’가 생겨난 것이다. 주사파들은 자기네가 숨어서 읽고 떠받들게 된 주체사상이 원본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자들이다. 김일성 세력이 이들에게 엉터리 공산주의인 주체사상을 지속적으로 주입시켜온 결과가 386 주사파이다.” 전 러시아주재 대사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인 이인호가 몇 년 전 한국 현대사 강의에서 한 이 말을 요즘 다시 생각하고 있다.

36년 전인 1985년, 몸담고 있던 신문사에서 나를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지사로 발령을 냈다. 바닷가에 가는 것 빼고는 딱히 할 게 없어 무척 심심한 날을 보내다가 하와이대학 도서관에 한국 책이 많은 걸 알고는 거기서 책을 빌려 시간을 보냈다. 그때 하와이대학에는 한국학연구소가 있었고, 한국계 교수와 유학생이 많았다. 그 도서관에 한국 책이 많은 이유였을 것이다.

소설을 중심으로 제법 많이 읽었지만 워낙 오래전이라 지금 제목이 기억나는 책은 여섯 권 한 질인 ‘해방전후사의 인식’ 하나밖에 없다. 이런 책-제목이 무겁고 딱딱한 책은 좋아하지 않는데도 소설을 다 읽고 나니 결국 이 책에도 손길이 가게 되었다. 여섯 권 다 읽었으나 지금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오만가지 연구를 한다지만 “우리 역사의 이런 부분까지 밝혀내려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약간의 경외감을 가졌던 기억은 있다.

제목이 기억나는 한글 책-한국 책이 아니라 한글 책-이 또 있다. ‘주체사상’이다. 어느 날 한국 책 서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국방색’ 바탕에 제목을 금색으로 인쇄한 한글 책 수십 권이 서가 여러 층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뽑아서 제목을 봤더니 ‘주체사상’이었다. 수십 권 전부 내용이 같은 단행본이었는지 혹은 각각 내용이 다른 전집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맨 아랫단 오른쪽, 즉 끝에 꽂혀 있던 책 표지에 ‘WHAT IS JUCHE?’라는 영어 제목이 역시 금색 글씨로 박혀 있던 기억은 또렷하다.

도대체 뭔 소리를 담았나, 호기심 때문에 뽑아 펼친 ‘주체사상’은 한 페이지도 읽지 않고 바로 덮었다. 책을 뽑아들기 전에 누가 날 보고 있지나 않나 사방을 훑어보기는 했으나, 책을 바로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은 이적 표현물을 소지하거나 읽은 사람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주체사상’은 너무 조잡했다. 서체와 편집, 지질이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는 ‘독서인’의 눈길을 오래 붙잡아놓을 만한 수준이 전혀 아니었다. ‘책 좀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판단을 내릴 것이었다.

맨 앞에 ‘민족의 태양’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 땅 여기저기 곳곳에 걸려 있던 ‘구국의 영웅’ 사진을 보는 것도 지겨울 때였는데, 경배를 강요하는 또 다른 인물 사진이라니! 이런 사진이 있는 책은 읽어볼 필요가 없다는 게 그때 내 생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 무렵 하와이대학에서 일어난 일화 한토막이 생각난다. 5공 대통령 전두환이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한국학연구소를 방문하면서 기념식수를 했다. 며칠 후 누가 이 나무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학교 측은 한국 대통령이 심은 이 나무를 살려보려고 뿌리를 파내 다른 곳에 옮겨 심었으나 이번에는 누가 발로 짓이겨 놓았다고 한다.)

‘세기와 더불어’라는 부제가 붙은 여덟 권짜리 ‘김일성 회고록’이 이달 초 국내서 출판됐다. 예약주문까지 받고 판매에 나섰던 대형 서점 중 교보문고는 이 책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자 판매를 철회했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가 인정되는 한국이지만 ‘김일성 회고록’까지 허용하는 게 옳으냐, 더구나 ‘전두환 회고록’은 역사를 왜곡하고 사자(死者)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출판이 금지되지 않았나?”라는 반대에, “민족의 태양이 나뭇잎 배로 강을 건너고, 솔방울 수류탄으로 적을 무찔렀다는 황당무계한 저질 판타지에 속아 넘어갈 만큼 어리석은 한국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오히려 북한 정권의 실상을 알게 될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며 “‘세기와 더불어’를 팔든 말든 크게 걱정할 건 아니다”라는 주장도 있다.

<strong>정숭호</strong>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이제 눈치 채셨겠지만, 나는 ‘김일성 회고록’이 시중에 나도는 걸 크게 걱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 정권하에서 이 책을 출판한 자들의 의도가 짐작되긴 하지만, 표지 디자인과 색채 감각이 여전히 ‘촌스러운’ 이 책이 그 의도를 달성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내용은 ‘황당한 판타지’ 그대로겠지. 그리고 비싸다. 젊은이들, 안 그래도 소득이 없다는데 28만원씩이나 주고 사서 읽을까 싶다. 나이 제법 든 사람이 제 돈 주고 산다면, 나는 다른 책을 사는 게 지식을 넓히고 영혼을 살찌우며, ‘사람이 주인인 세상’이 앞당겨지고, ‘민족’과 ‘조국’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을 간곡히 해주고 싶다.

물론 내 이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정과 감성을 앞세우는 자들은 이 책을 읽고 마음속에 자신은 물론 남까지 해칠 독초를 더 크게 키우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되겠나. 여러 가지 사특한 거짓말과 간악한 이중성으로 다수의 국민에게서 외면 받고 있는 주사파의 정체가 이 책을 통해 더 뚜렷이 밝혀질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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