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산을 산이라고 하고 물을 물이라고 합니다./ 몸을 옷으로 감추지도 드러내 보이려 하지도 않습니다./ 물음표도 많고 느낌표도 많습니다./ 사금파리 하나도 업신여기지 않고 흙과도 즐거이 맨손으로 만납니다./ 높은 하늘의 별을 우러르기도 하지만 청마루 밑 같은 데에도 곧잘 시선이 머뭅니다./ 마른 풀잎 하나가 기우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옹달샘에 번지는 메아리결 한 금도 헛보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그 기대로 가슴이 늘 두근거립니다.”

정채봉 시인의 <찾습니다>라는 시의 일부일세. 시인이 ‘지나온 세월 속에서’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은 뭘까? 찾아주는 분을 ‘행복의 은인’으로 모시겠다는 걸 보면 그에게 아주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오늘 하루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라니 나도 꼭 갖고 싶구먼. 그게 뭔지 짐작이 가는가? 답은 ‘동심(童心)’일세. 어린 아이의 마음이야. 오늘은 지난 세월 세파에 시달리면서 잃어버렸던 동심의 세계로 되돌아가보세.

사내애와 기집애가 둘이 마주 보고/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고 있다/ 오줌 줄기가 발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서로 오줌 나오는 구멍을 보며/ 눈을 껌벅거린다 그래도 바람은 사내애와/ 기집애 사이 강물소리를 내려놓고 간다/ 하늘 한켠에는 낮달이 버려져 있고/ 들찔레 덩굴이 강아지처럼/ 땅을 헤집고 있는 강변/ 플라스틱 트럭으로 흙을 나르며 놀던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때 자주 읊는 오규원 시인의 <들찔레와 향기>라는 시야. 하늘에는 낮달이 떠 있고, 찔레 향기가 코를 간질이는 강변에서 “오줌 줄기가 발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서로 오줌 나오는 구멍을 보며”눈을 껌벅거리고 있는 ‘사내애와 기집애’모습.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지 않는가? 강변마을에 살았던 나도 어렸을 때 저렇게 놀았네. 그땐 아직 플라스틱이 흔한 시절이 아니라 고무신으로 트럭을 만들어 모래를 나르는 놀이를 자주 했지. 해가 저물 때까지 놀아도 배고픈 줄도 몰랐어. 세상 풍파에 시달리면서 너도 나도 다 잃어버린 순수성이 그리울 때면, 넓은 백사장에서 함께 소꿉장난하며 놀던 동무들 사이에 강물소리 내려놓고 가던 시원한 바람들의 부드러운 촉감 떠올리며 혼자 다짐하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자고.

혹시 송수권 시인의 <여승(女僧)>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고뿔을 앓고 있던 어느 봄날, 토방 아래서 염불을 외우고 있는 여승의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음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에 반해서 동구 밖까지 여승의 뒤를 따라 갔던 시인의 어릴 적 경험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야. 시인은 이 시를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詩)를 쓴다.”고 고백하면서 마치고 있네. 동심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 시인에게 동심이 깃든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 시를 쓰는 힘이 되었듯, 많은 사람들에게 동심은 맑고 향기로운 어른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야.

다음은 정희성 시인의 <교감>이라는 짧은 시야.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 있다/ 어린아이가 그걸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만/ “내려와아, 위험해애”

교감(交感)은 여러 마음이 함께 움직이는 걸세. 서로 마음을 주고받아야만 가능하지. 전깃줄 위에 앉아 있는 새와 그걸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서로 통했나 보네. 그러니 새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어린아이가 금세 눈물을 글썽일 수밖에. 저 시를 읽는 우리들 가슴도 따뜻해지지 않는가. 우리들도 어렸을 땐 다 저런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고 있었네. 그게 바로 맹자가 말했던 측은지심이야. 하지만 합리성을 강조하는 학교 교육과 이런저런 세파에 시달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저런 교감능력을 잃어버렸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한 속물이나 괴물이 되어버린 거야.

‘내려와아, 위험해애’는 어린아이가 전깃줄 위에 있는 새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닐세. 가족 동반 학회 출장, 아파트 다운계약, 논문 표절, 유럽산 도자기 1000여점을 외교관 이삿짐으로 들려와 판매한 부인의 불법 행위 등으로 대다수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일부 장관후보자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네. 또 회사 돈을 횡령해 뇌물을 공여한 불법행위로 2년 6개월의 실형 선고를 받고 수감 중이고, 주가조작 분식회계 등의 범죄 혐의로 아직 재판을 받고 있는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을 요구하는 경제 5단체,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조중동 등 보수언론에게도 제발 이제 그만 하고 “내려와아, 위험해애”라고 말해주고 싶어.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후안무치할까? 왜 종교인들까지 나서서 몰염치한 요구를 하고 있을까? 경제나 반도체 위기론을 내세우지만 정답은 자기들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 때문이야. 김남주 시인이 <어떤 관료>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가 누구든 돈을 주는 사람이 주인이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그래서 누구든 돈을 최상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순간 돈에 영혼을 팔아버린 개가 될 수밖에 없어.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가슴 아팠던 대사가 생각나는군.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먼 옛날 노자라는 할아버지도 ‘갓난아이’가 바로 도(道)라고 말했는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심을 잃고 속물이나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서글퍼. 우리만이라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괴물 소리 듣지 말고 사람답게 살다 가세.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올곧게 살 수 있는 힘은 동심에서 나온다는 걸 잊지 말고.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