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요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공개 활동이 뜸하다는 게 우리 대북부처 당국자들의 분석이다. 어쩌다 모습을 보인다 해도 평양에서의 회의 주재나 행사참관 등이 주축을 이룬다. 지방 도시와 군부대, 공장·기업소 등을 쉴 틈 없이 오가던 예전과 달라졌다. 

이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에 대한 우려가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최고지도자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경우 치명적일 수 있다는 권력 내부의 논리가 배경에 깔려있을 공산도 크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의 최근 공개 활동 모습을 보면 특이한 장면이 포착된다. 수많은 주민이나 군중이 집결하는 행사장에 김정은 위원장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장시간 머물며 대화를 하거나 행사·공연 등을 지켜보는 일이 드러나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부인 이설주나 소수의 핵심 측근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 초 평양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군인가족 예술소조 공연 참가자들과 기념촬영을 했고, 그에 앞서 공연 관람을 하는 장면도 북한 관영 매체를 통해 공개됐다. 무엇보다 각 지방에서 올라온 참가자들과 밀접하게 접촉한다는 건 ’최고 존엄‘으로 불리는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코로나19 방역 대책이라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술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북한의 논리나 격식대로 이를 꼼꼼히 따져보면 결국 ’김정은 위원장은 코로나19 백신을 맞았을 것‘이란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많은 군중들과의 접촉 과정에서 최고지도자를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사실, 북한 권력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차지하는 위상을 놓고 보면 아직까지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일 수 있다. 코로나19 창궐로 인해 자칫 최고지도부나 권력 핵심에 피해가 생길 경우 파장을 모를 리 없는 북한 당국이나 방역 전문가들이 가장 신경을 썼을 대목이 바로 김정은 위원장이 쓸 백신 확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신을 확보해 접종을 마쳤을 것이라는 얘기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 북한도 백신의 효용성에 주목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해 주력했다. 코로나19 백신을 국제 공동구매 방식으로 제공하는 프로젝트인 ’코백스 퍼실리티‘를 통해 영국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199만2,000회분을 확보했다는 관련 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5월 중 공급받기로 한 170만4,000회분은 북한에 건네지지 못하고 차질을 빚고 있다. 북한 내 유통을 위한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거나 북한이 접종과 관련한 국제기구의 모니터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때문이란 얘기도 흘러나온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북한은 백신의 부작용을 주민에게 부각 선전하면서 자체적인 방역 강화 캠페인에만 매달리고 있다. 지난 5월 4일자 노동신문은 “왁찐(백신)이 결코 만능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여러 나라의 실태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면서 백신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북한 당국의 입장을 두둔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다.  

노동신문은 “효능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됐던 일부 왁찐들이 심한 부작용을 일으켜 사망자까지 초래된 것으로 해 여러 나라에서 벌써 사용을 중지시켰다”고 강조했다. 또 일부 돌파감염 사례를 거론해 “접종을 마친 사람들 속에서도 악성 바이러스 감염사례가 확인되고 있다”고 전했다. 백신의 효용성에 눈뜨고 이를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건 경쟁을 하는 국제사회의 분위기와는 딴판이다.
 
지난 5월 2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바이든 미 행정부의 대북정책 향배를 둘러싸고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와 ’외교를 통한 해결‘에 방점을 둔 조율을 벌인 자리다. 

그런데 정상회담 공동성명 가운데 북한 문제 등을 다룬 ’한·미 동맹의 새로운 장을 열며‘파트는 3분의 1 정도 분량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포괄적 협력’이란 대목으로, 여기에는 기후변화와 글로벌 보건, 5G와 6G 기술,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우주탐사 등의 분야가 망라됐다. 특히 코로나19와 관련해서는 “한국과 미국은 그간 코로나19 대유행과 오랜 글로벌 보건 도전과제에 있어 핵심적인 동맹국이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 누구보다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봤을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적지 않은 열패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된다. 북핵이나 미사일 위협 같은 기존의 위협이나 도전 요인은 상당 부분 코로나19 이슈에 밀려 버렸고, 한·미 정상이 논의한 기후변화 등의 이슈는 북한이 끼어들 틈 없는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란 점에서다. 한국의 대기업이 미 조지아주 애틀란타에 전기차 배터리 생산 시설을 짓고,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상황도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엘리트들에게는 착잡한 마음을 갖게 하는 일이었을 게 분명하다.

이제 북한도 냉철한 국제사회의 현실에 눈떠야 할 때다. 관건은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과 리더십이다. 최고권력자의 말 한마디, 판단 하나에 체제의 명운이 좌우되는 북한의 특성을 감안하면 김정은 위원장의 어깨에 향후 북한이 국제협력을 통한 생존의 길로 가느냐, 아니면 더욱 심각한 고립의 상황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을 것인가 하는 게 판가름 난다. 

자신과 극소수 핵심 엘리트만 코로나19로부터 빗겨날 수 있다면 문제없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이미 코로나19 등 팬데믹 상황에 대한 대처와 백신확보 등의 역량은 한 국가의 위상과 지도자의 리더십이 됐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2년 4월 김일성 광장에서 집권 후 첫 공개연설을 통해 “다시는 우리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핵·미사일 개발로 자초한 대북제재로 인해 지켜지지 않았다. 급기야 지난 4월 노동당 세포비서 대회에서는 “다시 고난의 행군을 할 결심을 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행사장에서 연설을 하며 눈물을 보인 건 어쩌면 답답하고 풀리지 않는 경제난 등을 떠올린 결과일 수 있다.

지금 한 국가나 체제의 최고지도자가 국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백신이다. 주체와 자력갱생도 중요한 가치일 수 있지만, 자체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웃과 손잡고 협력하는 것도 방도다. 한국과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한 백신지원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북한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그토록 강조해온 애민정치도 백신확보를 통해 평가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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