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계는 IT기술의 끝을 달리는 첨단산업의 정점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단순한 '정전'하나에 생산 현장 전체가 엄청난 타격을 받을뿐만 아니라, 재가동까지 수개월이 걸린다고 한다./=사진=뉴시스, 그래픽=박설민 기자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각각 산업의 ‘쌀’과 ‘빵’이라고 불리며, 전 세계 IT산업이 현재와 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지금의 스마트폰과 컴퓨터, 자동차, 인공지능(AI) 등 거의 모든 IT산업 분야에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역할은 지대하다. 때문에 이 산업분야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망하지 않을 산업’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이처럼 무서울 것 없는 전 세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계에서도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정전(blackout)’이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일시적으로 전기가 나가는 현상’ 말이다. 첨단 공업 기술의 상징인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현장에서 우리는 별거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단 ‘0.1초’의 정전조차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공정 중간에 정전이 발생하게 되면 해당 웨이퍼와 글래스는 폐기처분을 해야한다. 이는 엄청난 금액적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사진은 반도체 제작에 사용되는 웨이퍼의 모습./ 사진=뉴시스

◇ 반도체 생산 현장의 악몽 ‘정전’… 한 번 멈추면 웨이퍼·글래스 전부 파손

단순히 공장이 아주 잠시 동안 멈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정전사태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 현장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재난으로 꼽는 이유는 반도체·디스플레이의 공정과정을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공정은 정밀하게 원자·분자 단위의 물질들을 제어하고 반응시켜 수십-수백 nm(나노미터) 두께의 층을 쌓거나 깎아 수 nm 스케일 선폭의 구조물을 생성해야 한다.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등 주요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업체들은 주로 ‘PECVD(플라즈마 화학증기증착)’ 방법을 이용해 제품을 생산한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사들은 보통 실리콘 (Si)계열막을 증착시키기 위해 SiH₄나 TEOS 등의 Si이 함유된 가스를 증착 과정에서 제어하기 쉬운 ‘플라즈마(중성 원자 또는 분자로 구성된 기체가 에너지를 받아 이온화된 상태 또는 이온화된  기체. 물질 제 4의 상태)’ 상태로 바꿔 사용한다. 이것이 ‘PECVD(플라즈마 화학기상증착)’ 방법이다.

이때 반도체 공정 설비 내에서 SiH₄ 가스를 플라즈마 상태로 만들 경우 플라즈마와 플라즈마가 아닌 물질 사이에는 쉬스(sheath)라는 영역이 형성되는데, 이는 준중성이 깨지는 양전하 공간이다. 이 쉬스 영역 전기장에 의해 미세 나노 입자들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상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정전이 될 경우, 쉬스 영역 위에 둥둥 떠있던 이 나노 입자들은 순식간에 웨이퍼나 글래스로 떨어지게 되면서 입자적 결함으로 작용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해당 웨이퍼와 글래스는 다시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파손이 일어나게 된다.

쉽게 말해 피자(반도체·디스플레이)를 만들기 위해 웨이퍼와 글래스(피자도우)에 토핑과 소스(플라즈마 상태가 된 Si가스 원자)를 올려야 하는데, 요리사가 그냥 피자 도우에다 토핑과 소스를 끼얹어버린 셈이다. 이렇게 되면 피자는 완제품으로 판매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우 역시 소스에 푹 젖어 다시 사용할 수도 없다.

짧은 정전이라도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사들에게 악몽 같은 일이다. 지난 2월 미국 한파로 인해 정전이 일어난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의 피해규모는 3,000억원에서 4,000억원 수준이다./ 사진=뉴시스

◇ 정전 한 번에 4,000억원 규모 피해… 재가동에 한 달 넘게 걸릴 수도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사들에게 악몽 같은 정전으로 인한 설비 가동 중지는 막대한 경제적 타격으로도 직결된다.

지난달 29일 삼성전자 1분기 실적 컨퍼런스콜 당시, 한승훈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전무는 “지난 2월 17일 미국의 기록적 한파로 인해 발생한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 정전 사태 당시 피해 규모는 웨이퍼 총 7만1,000장 정도에 피해금액은 3,000억에서 4,000억원 수준”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대만의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 TSMC역시 지난달 23일 약 6시간 동안 발생한 정전 사태에서 1,000만~2,500만달러(한화 약 112억~280억원)의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정전이 한 번 일어났을 경우, 다시 복구까지 걸리는 시간도 매우 길다는 것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 종사자의 설명에 따르면 10초 이내의 짧은 정전이 발생했을 경우 생산 설비 복구 시간까지는 약 3~4일 정도가 소요된다. 몇 시간 이상의 장기 정전이 발생했을 경우엔 피해가 훨씬 큰데, 이 경우 다시 생산설비의 재가동까지 최소 한 달에서 세 달 정도의 긴 시간이 소요된다.

업계 관계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 현장에서의 정전은 단순 웨이퍼와 글래스 피해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며 “정전 당시 구동하고 있던 로봇 등이 순간 정지할 경우, 웨이퍼와 글래스가 파손되고 거기서 나온 오염물질들이 설비를 망가뜨릴 수 있다. 그걸 다시 클리닝하고 정상화하는데 굉장한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의 경우, 지난 2월 정전 사태로 운행을 중단한 후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3월 말에나 돼서야 재가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같은 기간 정전 사태로 가동이 중단됐던 네덜란드의 반도체 제조사 NXP역시 공장 재가동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업계 관계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일반 가정에서 TV, 전자레인지 등은 정전으로 순간 가동을 멈출 경우, 다시 전력을 공급받아 전원만 킨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일단 그 글래스와 웨이퍼는 쓸 수가 없다”며 “반도체·디스플레이 양산 라인 하나당 보통 수천~수만대의 글래스와 웨이퍼가 동시에 공정을 진행 중인데, 공장이 갑작스럽게 정전이 일어난다면 그 글래스와 웨이퍼들은 전부 폐기 절차를 밟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데 보통 디스플레이 글래스 한 장에 200~300대의 스마트폰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피해임을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덧붙였다. 

한번 정전된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설비를 재가동하는데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환경안전을 위한 조치도 주된 이유다. 후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현장에서는 정전이 발생할 시 유독물질 유출 방지를 위해 수백개의 공급장치들을 강제로 정지하기 때문에, 재가동시엔 일일이 점검해 다시 가동해야한다. 사진은 지난 1월 유독물질이 유출된 LG디스플레이 파주 공장./ 사진=뉴시스 

◇ 겹겹이 쌓인 환경안전조치도 재가동 딜레이 요인

환경안전을 위한 조치들 역시 정전 후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설비를 재가동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정은 가스 등 수백~수천가지의 화학물질을 사용되는데 이라는데, 이들 대부분이 불소, 타마(TMAH) 등 심각한 유독성을 가지고 있는 물질이다. 때문에 일단 정전 등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누출을 막기 위해 강제로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 반도체 업계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타마로 알려진 수산화테트라메틸암모늄의 경우 단 한방울만 피부에 접촉해도 순식간에 체내로 퍼져나가 사망에 이를 수 있을 정도의 맹독성을 가진 물질이다. 지난 1월 파주 LG공장에서 타마 유출사고가 발생했고, 이를 접촉한 40대 근로자 한명이 결국 두 달 만에 숨지기도 했다.

관련 업계 전문가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과정에서 사용되는 유독물질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정전 발생시 유출되지 않도록 이런 것들을 순차적으로 다 차단을 해야한다”며 “그런 것 중 한가지만 유출되도 주변 환경 피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전이 발생했을 시 일단 자동으로든 수동으로든 신속하게 전부 차단하게 된다”며 “정전 사태가 안정화되고 공정 설비를 다시 킬 경우, 앞서 강제로 비상 차단을 했기 때문에 관 사이의 압력, 설비 파손 정도 등 수백~수천가지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전부 점검하면서 재가동 절차를 밟아야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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