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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의 늦은 수다] 서로 가엾어 하기
[정숭호의 늦은 수다] 서로 가엾어 하기
  • 정숭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6.0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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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오진영 작가의 ‘새엄마 육아일기’, 김진호가 TV에서 “주러 갔지만 더 받아서 온다”고 말하고 있는 모습, 한유미의 ‘솔선수범 민주화’가 TV에서 소개되고 있는 모습. / ‘새엄마 육아일기’ 표지, tvN 캡처, SBS 스포츠머그 캡처.

SG워너비의 메인보컬 김진호(35)를 며칠 전 TV 토크쇼에서 봤다. 신문 방송에서 이름은 보고 들은 적 있지만 정체가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SG워너비가 2000년대 초반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남성보컬그룹이었다는 것, 김진호는 ‘소몰이 창법’이라는 독특한 테크닉으로 수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던, 대단했던 가수였음을 TV를 보면서 전화기 글자판을 눌러 검색해냈다.

무엇이 흘러간 가수 SG워너비와 김진호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나? 왜 나는 TV를 보다 말고 전화기를 잡아당겨 그의 이름을 검색하게 됐나? “나는 주려고 갔는데, 갔다가 오면 내가 받은 게 훨씬 더 많아요. 내가 그들을 힘내라고 격려하러 다니는데, 정작 격려는 내가 더 받아서 돌아오지요.” 그의 말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기 때문이다.

TV와 검색에서 알게 된 것을 조금 더 풀어놓으면, 인기의 절정에서 내려와 과거의 바쁜 나날에서 벗어난 김진호는 인기 음악인의 공연을 직접 보기 어려운 산골 고등학교나 소도시 병원에서 와달라고 신청하면 동료들과 함께 음향기기를 들고 내려가 공연을 하는 재능기부를 10년 가까이 해오고 있다. 비용도 모두 자기가 부담한다. 김진호는 자신의 이런 일을 재능기부가 아니라고 했다. “물론 나의 재능을 쓰는 것이지만 사실은 나도 받으러 간다. 그런 공연을 하고 오면 어떤 허전함과 공허함이 채워지고, 내가 노래를 하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너무 오래 세상의 거친 면만 보고, 그런 것들을 경멸하기 위해 내 나름 날 세워 모진 말만 글속에 쏟아 담았기 때문인가, “주러 갔는데, 더 받아 온다”는 서른다섯 살 이 청년의 경험에서 우러난 고백에 순간 울컥해지고, 눈가가 붉어졌던 것이다.

전 국가대표 배구선수였던 한유미(39)도 TV를 보던 나를 감동시키고 울컥하게 했다. 은퇴 후 KBS 스포츠 해설위원으로 일하면서 박세리 등 이름난 여성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노는 언니’라는 예능에도 출연하고 있는 그는 예쁘고 늘씬하다. 배구실력까지 뛰어났으니 팬이 많았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외모다. 하지만 그는 한국 여자배구에 그런 것보다 훨씬 큰 걸 남긴 사람이다.

한국 스포츠계의 선후배 시스템이 철저한 것은 우리 모두 다 안다. 힘든 일은 거의 대부분 후배의 일이다. 구기 종목의 경우 필요한 장비는 모두 후배들이 들고 옮긴다. 그물, 공이 든 자루, 물주전자, 스포츠 음료, 아이스박스, 수건 등등 경기와 훈련에 필요한 공용 물품과, 심한 경우 선배들의 가방 등 개인용품도 후배들이 챙겨야 한다. 선배들의 유니폼도 빨아야 한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런 잡일은 후배의 몫이다. 숙소에서도 선배의 심기를 안 건드리기 위해 죽은 듯 지낸 뛰어난 후배들이 많다고 한다.

한유미는 어릴 때부터 이런 시스템에 길들여졌지만, 주장이 되자 기득권을 버렸다. 자기 것은 자기가 챙겼다. TV에서 한유미는 “얘들아, 이제부터 내건 내가 들 거야. 공용 물품도 나눠서 옮길 것이고”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했다. 고참 선수들에게 자기 행동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말을 지켰다. 한유미의 솔선수범으로 수십 년 묵은 한국 스포츠계의 폐해, 불합리, 비민주적 관행이 부서지고 있다. 한유미의 팀이 이룬 ‘민주화’를 다른 여자 배구 팀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경쟁 종목인 여자 농구팀도 한유미가 시작한 새로운 관행을 채택했다. 기득권을 내려놓은 한유미의 짧은 말 속에 녹아든 분노와 인내와 눈물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울림이 나한테도 찌르르 전해진 게 아닌가?

페이스북에서만 만나는 이충원이라는 얼굴 본 적 없는 기자와 그 부인에게서도 감동을 받는다. 이 부부는 해외 입양 예정인 갓난아기를 집에서 돌본다. 입양기관에서 맡긴 거의 갓 태어난 아기를 20개월까지 키워내 해외의 새 부모에게 보낸다. 지금 키우는 ‘깔끔이’는 ‘토실이’, ‘힝순이’에 이어 세 번째 아기인데, 그가 써서 올리는 아기들 이야기를 읽으면 이 내외의 아이 사랑이 이만저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성을 다하는 게 훤히 보인다.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그들이 이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기 웃을 때 함께 웃고, 아기가 아파할 때 함께 우는 부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기가 해외 입양되게 된 사연도 알 수 없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저 귀엽고 예쁜 것들이 제 부모를 떠나더라도 그가 전하는 것처럼 계속 행복하게 웃고 살았으면” 하는 생각만 할 뿐이다. (연합뉴스 콘텐츠편집부 부장인 이 기자는 회사에서 부고-訃告-를 전문적으로 쓰는 것 같다. 충실하고 꼼꼼한 부고 기사다. 집에서는 새 생명의 미래를, 회사에서는 망자의 과거를 어루만지는 ‘극단의 삶’이 두 가지 모두에 충실하도록 하는 게 아닐까?)

이 기자의 페이스북에서 “결혼을 지속시키는 건 서로 가엾어 하는 마음”이라는 글귀가 눈에 크게 박혔다. 전문 번역가(포르투갈어)이자 날카롭지만 마음 따뜻한 논객으로 이름이 널리 난 오진영이 얼마 전에 낸 ‘새엄마 육아일기’라는 책에서 옮긴 것이다. 나도 오진영의 책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충격 비슷한 감동을 받고 한 번은 인용하리라 적어놓은 글귀다. 마흔 직전에 재혼한 저자가 여덟 살 새 아들을 20년 가까이 키워오며 받은 감동이 가득한 이 책에서 나는  이 글귀에 가장 깊이 꽂혔다. “서로 가엾어 하는 마음으로 지속되는 게 결혼만일까”라는 생각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