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어제(21일) 새벽 5시쯤 깨서 산에 올랐다. 잠이 줄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칼럼 마감을 해야 하는 날에는 유독 더 일찍 깨게 된다. ‘무얼 쓸 것인가’의 ‘무엇’은 간신히 찾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쓸 것인가’의 ‘어떻게’를 찾지 못하는 날에는 일찍 깨게 된다. <늦은 수다> 마감을 앞둔 어제도 그랬다. 눈을 뜬 후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 누운 채 ‘무엇’과 ‘어떻게’를 찾으려고 머리를 굴리다가 창밖을 보니 벌써 희부옇다. 새벽 산길을 걸으면서 답을 찾기로 했다. 아파트단지가 바로 산과 연결되어 있다. 물 한 병과 빵 조각을 배낭에 담고 나섰다. 5시34분.                                                                     

#1.새벽기운

새벽 산에는 고요하지만 가슴을 뛰게 하는 기운이 흐른다. / 정숭호 칼럼니스트<br>
새벽 산에는 고요하지만 가슴을 뛰게 하는 기운이 흐른다. / 정숭호 칼럼니스트

새벽 산에는 새벽 기운이 흐른다. 해질 무렵 산이 주는 느낌과는 다르다. 저녁 산의 느낌은 가라앉음, 정돈과 정리, 그런 것들로 찾아지는 평화로움이나, 새벽 산에는 고요하지만 가슴을 뛰게 하는 기운이 흐른다. 옅은 안개 속에 정밀(靜謐)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나무가, 숲이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의 흐름, 그 속에는 여름 나무들의 향도 섞여 있다.

전화기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그 시간에 깨어 있을 사람들에게 “이 사진 보면서 여름 산 새벽 기운을 느끼시는 분은 지금 침대에 누워 계시더라도 나의 동반자”라는 글을 보내고 싶어졌다. “이 사진에는 새소리도 들어있다. 저 맑고 높은 소리는 휘파람새일 듯”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어졌다.

#2.인사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내 또래 어떤 분이 눈이 마주치자 “안녕하세요?”라고 하면서 지나간다. “아, 예.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에 마주친 분도 먼저 나에게 인사를 한다. “다음 사람에겐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지”라고 마음먹고 실천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여섯 명쯤에게 인사를 했다.

산에서 처음 본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건 요즘에는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삭막해진 탓도 있을 것이고,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아서이기도 할 것이다. 10년 전쯤 늦가을 새벽에 산에 올랐을 때(새벽 산에 오른 건 이때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총총 걸음으로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내가 올라갈 때도 컴컴했는데, 벌써 내려오던 이 분은 좀 멀리 있던 나에게 고개를 꾸벅하고 “안녕하세요”라면서 지나갔다.

이미 산에서 인사를 하는 모습이 드물어진 때라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새벽이지만 아직 어둡고 인적도 드문 산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하면 혹시라도 자기를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거라는, 무서움 많은 분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에는 무장해제의 능력이 있지 않나. 지난주 산에서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하던 아주머니는 또 달랐다. “안녕하세요”라고 해서 “네, 안녕하세요”라고 답하고 지나가는데, “예수 믿으세요. 천국 갑니다”라는 말이 뒤에서 들려왔다.

#3.거미

새벽 산행에서 만난 거미집. 음악 CD처럼 동그랗고 크기도 딱 그만했다. / 정숭호 칼럼니스트 <br>
새벽 산행에서 만난 거미집. 음악 CD처럼 동그랗고 크기도 딱 그만했다. / 정숭호 칼럼니스트 

정상까지 20분쯤 남은, 등산로 두 가닥이 만나는 곳에 좌판 장수가 있다. 라면과 막걸리, 아이스크림, 다방커피를 판다. 막걸리 안주는 마른 멸치와 된장, 라면은 사발면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은 주말에만 장사를 하는 줄 알았는데, 월요일에 아침 7시도 안 된 이른 시간에 포장을 걷고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더 늘었나보다. 젊은이들도 요즘 산에 많이 오른다고 하잖는가. 코로나 때문에 갈 데가 사라져서.

꼭대기에 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계단(무려 460개)을 한 발 한 발 오르는데, 한쪽 구석에 손바닥만 한 동그란 형태가 홀로그램처럼 홀로 떠올라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음악 CD처럼 동그랗고 크기도 딱 그만했다. 햇빛 반사되는 것도 CD 같았다. 가까이서 들여다봤더니 거미였다. 쌀알만 한 거미가 열심히 그물을 치고 있었다. 그물망이 무척 촘촘했다. 아무리 작은 날 것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거미와 곤충들은 코로나19의 영향을 받지 않을 텐데 왜 이 이른 아침부터 저렇게 처절한 생업을 시작하나, 라는 같잖은 생각을 잠깐 했다.

#4.무덤

이 산에도 무덤이 많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이라는 말을 실천한 사람이 많았던 거다. 산 바로 아래에는 축구장보다 커 보이는 어떤 성씨 문중 묘가 있고 산 속에도 곳곳이 무덤이다. 어떤 무덤은 흔적만 남아 있다. 정상 얼마 못 미쳐, 사람이 많이 다녀 신작로처럼 넓어진 등산로 바로 옆에 있던 가족묘도 지금은 자리만 남았다. 등산객들 쳐다보는데 성묘하기가 민망해서였나, 행정당국이 미관을 고려해서 이장을 권했나, 묘소 자리만 여남은 개가 둥그렇게 남아 있다. 묘지들을 지나가다 20여 년 전 썼던 기사가 생각났다. 여기 있던 선산이 아파트단지로 개발돼 큰돈을 만지게 된 가문에서 벌어진 불상사가 소재였다. 돈은 생겼지만 우애는 쪼개졌지. 어떻게 수습됐나. 쪼개진 우애는 봉합됐을라나?

#5.햇살

꼭대기가 가까워지자 꽤 많이 솟아오른 태양이 나무와 안개를 뚫고 사방에 햇살을 찬란하게 뿌리고 있었다. / 정숭호 칼럼니스트
꼭대기가 가까워지자 꽤 많이 솟아오른 태양이 나무와 안개를 뚫고 사방에 햇살을 찬란하게 뿌리고 있었다. / 정숭호 칼럼니스트

꼭대기가 가까워지자 꽤 많이 솟아오른 태양이 나무와 안개를 뚫고 사방에 햇살을 찬란하게 뿌리고 있었다. 오늘 제일 좋은 사진을 건졌다. 사진을 찍은 후 꼭대기에 올라 저 아래 우리 동네를 내려다보며 물을 마시고 빵을 씹다가 ‘무엇’과 ‘어떻게’가 떠올랐다. 7시 1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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