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서예진 기자  최근 ‘능력주의’(Meritocracy)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2030 세대가 ‘공정’을 모든 행위의 대의명분으로 여기는 현 상황을 감안하면, 능력주의가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능력주의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란을 거치며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즉, 현재의 2030 세대는 ‘시험’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공정’한 경쟁을 했다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능력주의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들고 나와 주류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이 대표는 공천에 자격시험을 도입하겠다는 등 능력주의와 공정한 경쟁을 강조했다. 이같은 계획이 젊은 세대에게 어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대표의 출신 대학이 젊은 세대들에게는 능력주의의 ‘증명’으로 보였을 터였다. 

능력주의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펴낸 책 ‘능력주의’에서 나온 개념으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능력주의라 이름 붙이진 않았지만 그 동안 우리 사회 역시 능력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한국은 대학 입시 성적에 기초해 사람의 능력을 서열화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차등화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정서가 널리 퍼져 있다. 또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면, 성공이 보장된다는 믿음 속에 살아왔다. 그리고 입시 결과나 취업 결과를 내세워 서열을 만드는 것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묻고 싶다. 입시와 취업이 온전히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뤄진 결과일까. 입시 교육이 소득별, 지역별로 격차가 있다는 점은 꾸준히 지적돼 왔다. 또 공부는 유전적 영향을 받는다. 취업이나 각종 전문직 면허 시험 역시 가족이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

가정 환경, 학력, 지역, 신체조건 등의 환경은 온전히 한 개인의 능력인 것일까.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내가 노력하지 않고 얻은 요인일 뿐이다. 그런데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 지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렇기에 능력주의야 말로 공정하지 못하다.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끼리 경쟁을 유도하고, 그것이 공정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분제를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헌법에 평등의 가치를 담아낸 현대 민주공화국에서 시민들 간 차별을 독려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정치권에 능력주의의 화신이 등장한 게 반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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