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성찰배경: 요즈음 언론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 관한 다양한 갑질이나 내부정보를 이용한 투기 등의 의혹을 포함해 두루 추(醜)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 방안은 결국 가장 작은 기본단위인 가족공동체들이 바탕이 되어 국가를 이루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가족공동체에서 벌어지는 ‘가추(家醜)’에 초점을 맞추어 성찰하고자 합니다.

◇ 가추(家醜)

먼저 ‘집안의 부끄러운 일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뜻의 ‘가추(家醜)’를 검색해보면 ‘가추불외양(家醜不外揚)’이란 성어(成語)를 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시공을 초월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집안마다 감추고 싶은 일들이 적지 않기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늘 이런 생각이 내재되어 있었겠지요. 그 결과 물론 이 성어는 그 이전인 남송(南宋) 때의 보제(普濟, 1178-1253) 선사가 엮은 <오등회원(五燈會元)>에도 들어있었지만, 중국 청나라 때 적호(翟灝, 1736-1788)가 엮은 <통속편(通俗編)> 속에 마침내 글로 기록하여 일반대중들에게도 두루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 같습니다.

특히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살았던 예전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경우에 집안의 추한 꼴을 다른 이들이 모르게 집안 어른들이 발벗고 나서서 지혜롭게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 애쓰셨다고 사료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몹시 중독된 채, 서로 아끼고 보듬어야할 직계가족 사이에서조차 유산분배 등을 포함해 제반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걸핏하면 고소 고발을 통해 재판을 벌이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 수신제가(修身齊家)

그런데 가추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지름길은 우리 모두 일상 속에서 성찰 태도를 기르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먼저 고대부터 이어온 성찰의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동양문화권의 경우 필자의 전공인 ‘물리(物理)’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유교 경전 가운데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사물(事物)의 이치(理致)를 밝혀 온전한 지식(知識)에 다다름’이란 뜻의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말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서양문화권의 경우 ‘물리’ 관련 용어의 기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는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부유층인 상류계급은 노예를 소유하게 됐으며, 그 결과 ‘여가’가 생기자 자연스럽게 자연현상을 관찰하는 학자들이 출현했습니다. 그 가운데 ‘자연학(physica)’은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physis)’을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였습니다. 또한 오늘날 ‘물리학(physics)’이라 불리는 학문 분야는 그 어원만 살피더라도 바로 고대에서 중세로 계승됐던 자연학의 발전에 의해 형성된 분야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제도권으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인 여가를 이용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최초로 자연현상의 수식화에 성공한, 즉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1642-1727)을 필두로, 과학자들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외면(外面), 즉 자연 현상을 관찰해 물리학이란 학문을 발전시켜옴과 동시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류로 하여금 첨단물질문명의 삶을 누리게 하고 있듯이, 종교철학자들은 여가를 이용해 인간의 내면(內面)을 성찰하며 인간의 참 본성을 체득하고, 일상 속에서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본보기를 제공함으로서, 종교와 이념을 뛰어넘어 인류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가족공동체 구성원들이 ‘수신제가(修身齊家)’, 즉 일상 속에서 날마다 규칙적으로 독서와 함께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는 동시에, 아무리 바빠도 주말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서로의 고민들을 자연스레 나누다 보면 점점 더 돈독한 멋진 가족공동체로 거듭나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럴 경우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존심편(存心篇)에 있는 ‘마음으로 다른 이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결코 얼굴에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기색이 없을 것이다.[심불부인(心不負人) 면무참색(面無慙色).]’이란 금언처럼, 죄짓고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가리며 법원에 출두하면서 세상에 가추를 몽땅 드러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겠지요.

참고로 어린이들도 성찰 능력이 있다는 사례들은 무수히 많지만 가족 간에 일어난 기특한 ‘가추(?) 사례 하나를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지인 가운데 독서를 즐겨 했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만화로 된 <삼국지>를 30번씩이나 읽어서 그런지, 심지(心地)가 매우 깊은 애늙은이였습니다. 한 번은 사업에 바쁜 자기 아버지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 투석을 하며 병석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께 자주 문안 인사를 드리지 않는 것을 지켜보다가, 하루는 아버지에게, “아빠! 이 다음에 아빠가 할아버지처럼 병석에 누워 계실 때 제가 병문안을 자주 안 드려도 괜찮으시겠어요?” 하고 넌지시 여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크게 느낀 바 있어 이 아버지가 그 다음날부터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꼭 드리고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자기 아버지를 효자로 탈바꿈시킨 매우 속 깊은 녀석이었습니다.

덧붙여 오늘날 ‘학교(學校)’를 뜻하는 영어의 ‘school’은 ‘여가’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의 ‘스콜레(skhole)’ 또는 라틴어의 ‘스콜라(schola)’가 그 어원입니다. 즉 학교는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탐구하는 곳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서조차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오직 편법과 탈법도 마다하지 않고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한 무한 경쟁 속에서 쫓기는 삶을 살고 있으니, 이런 식으로는 배려심 깊으면서도 창의적인 인재양성은 결코 기대할 수 없겠지요.

◇ 가섭찰간(迦葉刹竿)

한편 ‘가추’를 세속적인 뜻과는 정반대로 멋지게 활용한 일화가 담겨 있는 ‘가섭찰간(迦葉刹竿)’(<무문관(無門關)> 제22칙)이란 공안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본칙(本則): 아난이 가섭 존자께 “석가세존께서 금란가사(金襴袈裟) 외에 또 어떤 것을 전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가섭 존자께서 “아난아!” 하고 부르셨다. 아난이 “네” 하고 응답하자 가섭 존자께서 “(설법을 마쳤으니) 문 앞의 깃대[찰간(刹竿)]를 내리거라!”라고 하셨다.

한편 이 공안에 대해 <무문관>의 저자인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께서 다음과 같이 게송(偈頌)을 지어 제창했습니다.

“물음보다 응답이 친절한가 어떤가? (그런데 이 화두를) 그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참구했던가!/ 형이 부르고 동생이 대답하여 만천하에 그 가추[家風]를 몽땅 드러내니, (이것이야 말로) 음양에도 속하지 않는 별세계의 봄이로구나.”

군더더기: 무문 선사께서 붙인 위의 게송 가운데 쓰인 ‘가추(家醜)’는 ‘스승의 멋진 가풍(家風)’이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 이 노래는 아난이 가섭 존자의 뜻을 인득했든지 안 했든지에 관계없이 형이 부르고 아우가 응답하는 가운데 음양(陰陽), 즉 이원적인 분별심이 완전히 끊어진 선의 진수를 몽땅 드러내고 있어 이 문답이야말로 백화가 만발한 봄소식이라는 것을 무문 선사께서 후학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덧붙인 것입니다.

참고로 이 화두에 등장하는 가섭 존자는 세존의 십대제자 가운데 두타제일(頭陀第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영산회상에서 세존의 법을 처음으로 이어받은 분입니다. 한편 선종(禪宗史)에 따르면 아난 역시 십대제자 가운데 한 분이며 다문제일(多聞第一), 즉 세존의 설법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세존 생전에는 깨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존 입멸 후 남기신 유교(遺敎)를 결집할 때 처음에는 참가하지 못하다, 나중에 가섭 존자에게 깨달음을 인가(印可)받고 참가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금란가사는 석가세존 생전에 이모였던 마가파도파제 부인이 세존께 금실로 수놓은 가사를 한 벌 지어 올린 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후 선종(禪宗)에서는 세존께서 가섭 존자에게 이 금란가사를 전법의 신표(信標)로 전해준 것으로 여겨, 금란가사 또는 스승의 의발(衣鉢)을 전해 받은 분들을 선종의 조사(祖師)로 숭앙(崇仰)해왔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지혜롭지 못한 불제자(佛弟子)들이 피상적으로 겉모습만 취해 자신의 스승이 최고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금란가사를 지어드리며 검소하고 청정해야할 수행자의 정신을 망각하게 하는 불충(不忠)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이 주제는 비단 출가(出家)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금란가사에 견줄 수 있는 외모 고치기나 명품 휘감기 등을 포함해, 어리석게도 ‘가추’인 줄 모르고 겉껍데기 과시하기에 중독(中毒)된 재가(在家)의 세계에서도 깊이 성찰해야 할 주제라고 판단됩니다.

끝으로 지난번 칼럼에서 ‘가족에 대한 단상’을 기고했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대가족제도의 큰 쓰임’이란 대목은 이번 글과 상보적(相補的)이라 사료되어 함께 살피기를 적극 권해 드립니다. 관련 자료: [박영재의 향상일로] ‘가족’에 대한 단상 http://www.sisaweek.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982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입자이론물리 전공)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강대 물리학교 명예교수다.

한편 1975년 선도회 초대 지도법사였던 종달 선사 문하로 입문했으며, 1987년 스승이 제시한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0년 종달 선사 입적 이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또한 1991년과 1997년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께 두 차례 입실점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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