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8 09:08
[하도겸의 문예노트] 국제구호활동과 이웃에 대한 은혜
[하도겸의 문예노트] 국제구호활동과 이웃에 대한 은혜
  • 하도겸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05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은 경주 아사가차관의 김이영 대표가 초승달마저 사라진 녹색 바다를 다완에 구현한 것이다. / 하도겸 칼럼니스트 제공
사진은 경주 아사가차관의 김이영 대표가 초승달마저 사라진 녹색 바다를 다완에 구현한 것이다. / 하도겸 칼럼니스트 제공

선도성찰나눔실천회(이하 ‘선도회’) 2대 지도법사이신 법경(法境) 박영재 거사께서는 늘 선도회 게시판에 올리는 좋은 글을 카카오톡을 통해 법보시 해주곤 한다. 예전에 그런 글들 가운데 ‘약무근린(若無近隣) 시무법경(是無法境)’이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가까운 이웃이 없으면 나도 없는 것이다”라는 뜻인 듯하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부모, 이웃, 나라, 스승의 고마움 즉 사은(四恩)을 돌아보고 강조한 말씀으로 수행자라면 늘 깊이 참구해야 할 화두와 같다.

우리는 예로부터 고마움 나아가 은혜를 아는 존재를 사람이라 불렀으며, 배은망덕한 것을 축생[짐승]만도 못하다고 경멸해왔다. 지금 조금이라도 행복하거나, 또는 덜 불행하다면, 나 혼자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가까이에 계신 모든 분들의 도움 아니 존재 덕택이다. 나아가 자기가 선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이나,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성인의 도리가 아니라 사람의 기본적인 도리이며 살아가는 매순간 그런 고마움들을 몸에 새기고 실천에 옮기고자 애써야 할 덕목이기도 한다. 실제로 이것만 가능하다면, 구태여 따로 참선 등 요란하게 수행할 필요도 없다.

집에서 직장에 다니며 우리는 가족, 동료, 선후배, 동네 주민을 비롯한 수많은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교류하고 있다. 가끔 싫거나 피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또한 이유가 있어서 나를 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 나의 자화상이므로 늘 이웃을 바라보며 관계를 맺고 있는 자신을 법과 번뇌의 거울에 비추어 봐야 한다.

그렇게 남의 잘못을 보면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처럼 보며,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늘 남 탓이 아닌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는 계기로 삼아야 하고, 그 까닭에 다른 이들의 잘못을 볼 때도 연민을 가지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늘 이런 생각을 하고, 말도 하고, 실천도 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머리로만 아는 것에 끝나는 일이 허다하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란 아는 것과 실천함을 일치시켜야 하는 것으로 앎이라는 것 자체가 지(知)가 아니라 지행을 말하는 것이라고 언젠가 운 좋게 알아차린 적이 있다. 그냥 머리로만 아는 것은 진짜 아는 것이 아닐 것이다. 머리와 상관없이 아니 알지 못해도 공부하거나 수행하지 않아도 늘 그렇게 성실하게 자비심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면 앎이란 곧 지행이 아닐 수 없다. 즉 머리나 입이 아닌 몸으로 습득해서 늘 실천해야 하기에 지(식)이 아니라 지행(知行)이라고 한 것이다.

가끔 멀리 있는 친구가 보내준 그윽하고 상쾌한 향기를 품은 보이차를 받아 마실 때가 있다. 차를 우리거나 마시기도 전에 차 봉지를 여는 것만으로도 그 차향을 맡자마자 절로 “와”라는 탄성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몸이 먼저 알아서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으로 아는 것도 있고 이것을 머리가 아닌 몸이 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차를 열어보기도 전에 어쩌면 차를 보내준 믿음직한 도반의 마음을 먼저 알고 거기에 담겨 있는 마음이 전하는 마음을 미리 알고 그에 먼저 감사하는 것은 아닐까도 싶다.

이렇게 마음으로 전하고 몸으로 알아서 실천하는 것이 선도회 초대 지도법사 종달(宗達) 선사의 통보불이(洞布不二)라는 가풍(家風)과도 상통한다고 생각된다. 통찰이라는 참선과 나눔이라는 실천은 둘이 아니라는 통보선(洞布禪)은 곧 은혜를 알고 매일 매일 생활 속에서 갚아나가는 은혜 갚기 즉 보은 수행의 다른 표현일 듯싶다.

안도현 시인은 “연탄 한 장”이라는 시에서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때로는 은혜를 알면서도 갚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라며 시인은 희생 나아가 보은을 모르는 스스로를 포함한 우리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겼다.

결국 은혜 갚기는 머리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천냥 빚을 갚는 것은 처세를 위한 말장난이지 수행자가 입에 담을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냥 연탄처럼 온몸으로 스스로를 불태우면서까지 이생에서 아니면 죽어서라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려는 다짐으로 다 갚아나가야 한다.

우리네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태어나기 전부터 받은 은혜를 서서히 때로는 급하게 갚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기 전에 은혜를 갚을 수 있는 행운은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오진 않는다. 그런 커다란 행운처럼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고 그리고 또 사은에 대한 가르침을 만났다. 그러니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생각으로 때로는 시절인연에 맞게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완급조절을 하며 은혜를 갚아가야 할 것이다.

세월이 좋아져서 우리나라에 산다는 이유로 가끔 좋은 보이차를 함께 나누며 마시기도 한다. 우리 국민이라면 대부분 OECD에 가입된 선진국에서 태어났고 더러 힘든 알바도 했지만 그래도 부모를 잘 만난 덕택에 학교도 큰 문제없이 다닐 수 있다. 스승의 은혜는 물론이고 다 같이 힘을 보탠 이웃[우리 어르신 세대] 덕택에 우리는 지금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호사를 누리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불혹(不惑)이 되기 전에 사은의 중요성을 일부 알아차리게 되는 인연을 지었다. 그 실천의 일환으로 2007년 8월 15일부터 NGO 나마스떼코리아 도반들과 함께 먼 나라 네팔을 중심으로 히말라야 산골 오지 마을 사람들과 교류해 오고 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나눔과 배려, 그리고 존중 등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실천하다보면, 점차 사람들의 도리를 몸으로 배워가게 된다. 비록 조금이지만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 아껴 쓰고 다시 쓰는 등 검소하게 살며 자연스럽게 절약을 하게 되기도 한다. 환경에도 도움이 되는 이런 선행을 지행합일의 모범이 되는 부처님께서는 평생 실천하셨을 것이다.

매년 한 번 이상 네팔과 인도를 찾아 현지 봉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봉사가 아닌 단순히 히말라야로 떠나는 여행이나 트래킹은 더 이상 순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순한 사치나 허영이 담긴 여행을 말할 필요도 없고, 자신만을 돌아보는 이기적인 여행은 제 아무리 산티아고 순례라고 포장해도 결국 버킷리스트를 채우는, 즉 명품가방을 구입하는 것과 같이 열등감을 포장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도겸 칼럼니스트
하도겸 칼럼니스트

진정한 순례라면 부처님을 비롯한 성인의 마음과 수행의 족적을 따르며 온몸으로 스스로를 연탄처럼 불태우는 봉사정신을 온 몸으로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으며,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나만이 아닌 나와 연결된 모두에 대한 고마움과 그에 대한 은혜 갚기까지 생각의 흐름의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다 말뿐인 ‘가짜’ 순례이며, 그런 행동을 하는 수행자가 있다면 참된 스승이 아닌 ‘가짜 선지식’에 지나지 않을까.

우리는 이제 21세기를 넘어 글로벌 사회가 되었다. 이런 시점에서 국제구호 관련 NGO의 봉사활동이란 우리 국민의 일원으로서 오늘날의 우리를 있게 한 그리고 옆에서 지지해준 가까운 이웃을 넘어 더 먼 이웃나라 사람들에 대한 은혜갚기[보은]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는 떳떳하게 인간답게 이웃나라로부터 도움 받던 나라에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은혜갚기라는 사람으로서의 기본 도리를 실천하면 될 따름이다.

이런 저런 내용들을 담은 박영재 노사가 편찬한 새 책 『온몸으로 돕는 지구촌 길벗들』(마음살림)이 곧 나온다고 한다. 얼른 구해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