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무인판매점 냉장고 속 알록달록 수백 개의 아이스크림 중 ‘토마토 애플’이라고 쓰인 빨간 포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 정숭호 칼럼니스트
아이스크림 무인판매점 냉장고 속 알록달록 수백 개의 아이스크림 중 ‘토마토 애플’이라고 쓰인 빨간 포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 정숭호 칼럼니스트

어제 늦은 밤, 동네 걷기에 나섰다가 더위를 식히려고 아이스크림 무인판매점에 들렀습니다. 냉장고 속 알록달록 수백 개의 아이스크림 중 ‘토마토 애플’이라고 쓰인 빨간 포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토마토와 사과! 상큼하고 담백한 맛을 기대하며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곧바로 토마토향이 입 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과향은 못 느꼈습니다.

사과향을 못 느낀 것은 입속 토마토향이 바로 뇌로 번져, 거의 40년 전에 마지막으로 먹었던 토마토 빙수의 맛과 색깔을 불러낸 탓입니다. 뾰족한 산봉우리 모양으로 쌓인 얼음가루 위에 걸쭉한 토마토 시럽을 듬뿍 끼얹은 토마토 빙수! 토마토의 붉은 껍질과 노랑 씨앗, 연녹색 토마토 속이 설탕 많이 넣어 오래 끓인 시럽 안에 골고루 섞여 있습니다. 입맛을 돋우는 색깔, 신비해 보이기도 하는 빛깔입니다. 조심스레 비벼서 한 입 떠먹습니다. 입속이 토마토 향으로 가득해집니다.

우리 집은 제과점이었습니다. 저 멀리 경상도 북쪽, 고향에 아버지가 차린 제과점 간판이 ‘8·15’였다는 것은 2년 전 8월 15일 ‘8·15-우리 형제들의 별명’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밝힌 적이 있습니다. 8·15제과점의 겨울 상품은 속에 찹쌀떡이 들어있고 위에는 땅콩가루를 뿌린 단팥죽이었고, 여름상품은 빙수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빙과(氷菓, 얼음과자)들이었습니다. 8·15에는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얼음공장이 있었습니다. 모터와 모터를 돌리는 커다란 활차, 활차를 연결하는 넓고 두꺼운 벨트, 얼음을 얼리는 냉매(冷媒)인 암모니아 통, 간수로 가득 채운 제빙기, 얼음을 보관하는 냉장고(가로로는 어른 두 사람이 들어가고 세로와 높이는 어른 가슴께 높이 정도인)들입니다.

여기서는 얼음만 얼린 게 아닙니다. ‘아이스케키(아이스케이크)’와 ‘아이스캔디’도 얼렸습니다. 아마도 물에 설탕과 식용 색소와 바닐라나 포도향만 넣은 것은 아이스케키, 수박 간 것 등 약간이라도 천연제품을 넣은 것은 아이스캔디로 불렀던 것 같습니다. 아이스캔디에 우유를 넣은 것이 아이스크림이었을 겁니다. 아이스크림은 홀에 있던 아이스크림 기계로 만들었습니다. 혓바닥으로 핥아먹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이었지요. (우리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아이스케키와 아이스캔디와 아이스크림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 각각의 차이도 모르고 모든 얼음과자를 그저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가업’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ㅎ)

여름철 우리 집은 새벽부터 장사 준비하러 온 ‘아이스케키’ 장수들로 시끄럽고 부산했습니다. 아이스케키 장수들은 자전거에 아이스케키 통을 싣고 시골마을로 장사를 나갑니다. 아이스케키 통은 나무상자 속에 양철상자가 들어가 있는 모양입니다. 나무상자와 양철상자 사이에 얼음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는 색색의 아이스케키를 담습니다. 100개나 200개씩 담았지 싶습니다. 한쪽에서는 아이스케키 통을 채울 얼음을 깨는데, ‘함마(Hammer, 해머)’를 휘두르던 아버지는 금방 땀범벅이 됩니다. 그러다가 지치면 제과점 직원에게 땀에 젖은 함마를 넘겨줍니다. 어머니는 혹시 더 담지나 않았는지 꼬박꼬박 확인해 가면서 대소쿠리에 아이스케키를 담아 아이스케키 장수들에게 건네줍니다. 학교 가기 전이었던 나와 아우들은 아버지의 얼음 깨는 해머 소리에 잠을 깨거나, 아이스케키 장수들과 농담하는 어머니 웃음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곤 했습니다.

8·15도 처음에는 팥빙수를 팔았습니다. 홀 천장 한복판에는 커다란 선풍기가 느긋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선풍기 바람 아래 앉은 손님이 빙수를 주문하면 정사각형으로 큼직하게 자른 얼음덩어리를 빙수기계로 갈아 얼음가루가 무너질 듯 높이 쌓이면 팥 삶은 것과 미수가루를 올리고 설탕물을 끼얹어 냈습니다. 빙수기계는 팔로 돌리는 거라 홀에서 일하는 여 종업원들은 한두 그릇쯤은 갈아냈지만 오후 느지막이 여름 햇볕이 더 따가울 때 찾아온 손님들로 주문이 밀리면 얼음 가는 건 아버지를 비롯해 남자들 몫이었습니다. 나도 좀 자라서는 (중학생 때?) 하루에 열댓 그릇은 갈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해 여름, 빙수 철이 닥치기 직전에 아버지가 수동식 빙수기계를 들어내고 스위치만 올리면 얼음이 갈리는 전동식 기계로 바꾸던 날 어머니와 여직원들이 좋아하던 모습도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8·15에서 언제부터 팥빙수 대신 토마토 시럽을 끼얹은 토마토 빙수를 팔았는지, 이 신제품이 창작품인지, 서울 같은 큰 도시 제과점에서 팔던 걸 모방한 건지는 돌아가신 아버지만 아실 까, 물어볼 데도 없습니다. 다만 토마토 빙수 판매는 팥빙수처럼 텁텁한 맛이 덜하고, 단맛과 함께 새콤한 맛도 났으니 새로운 맛으로 새로운 고객을 창출하려던 아버지의 마케팅전략이 아니었나 생각도 해봅니다. 아니면 팥이 비싸져서 값싼 토마토로 원가를 낮추려는 원초적 경영전략이었거나 ….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어제 먹은 ‘토마토 애플’ 아이스캔디에는 아버지의 예전 토마토 빙수 맛이 들어있었습니다. 한여름 토마토를 한 접씩 썰어 뜨거운 불 앞에서 설탕과 함께 끓여낸 건 어머니셨으니 토마토 빙수 맛은 부모님이 만든 맛이겠네요.

땅콩버터 아이스캔디도 8·15의 여름 대표 상품이었습니다. 커다란 은빛 깡통에 든 미제 땅콩버터를 물에 풀고 우유를 섞어 팔팔 끓인 후 성형 틀에 하나씩 부은 후 막대기를 꽂아 얼린 아이스캔디입니다. 노란색이 많이 섞인 갈색이라 품위 있어 보이는 땅콩버터 아이스캔디는 땅콩과 버터 덕분에 고소함이 극치였습니다. 먹고 나서도 한참 동안은 혀끝에 땅콩의 고소함과 버터의 부드러운 기름기가 감도는 땅콩버터 아이스캔디 역시 거의 40년 전 8·15에서 먹은 것이 마지막입니다. 1974년 아버지가 사업 근거를 서울로 옮긴 후 8·15는 기억 속의 장소입니다.

아이스크림 공장장들아, 내가 보장한다. 땅콩버터 아이스캔디 만들어 내놓으면 대박이 확실하다!! 토마토 애플은 포장을 보니 미국서 개발된 것이구나, 어서 땅콩버터 캔디를 내놓아라!! 그리고, 빙수장수들아, 너희들은 토마토 빙수를 만들어라. 내 곧장 뛰어가서 사먹어 줄 테다!!
 

#.<‘8.15’-우리 형제들의 별명>은 아래 URL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11trout/221624778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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