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북한 관영 매체의 보도를 접하다 보면 의아하게 생각되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먹는 문제의 해결’이란 표현이다.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TV도 이를 비중있게 강조하고, 심지어 북한의 최고지도자도 공개연설을 통해 촉구한다. 다름 아닌 식량부족 사태를 풀 수 있는 방안을 농업담당 부서가 마련하고 협동농장 등이 곡물 생산을 늘리는 데 앞장서라는 주문이다. 

6차례의 핵 실험에 성공하고 ‘핵보유국’을 주장하는 북한의 모습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의 시험발사로 미국 본토 타격까지 위협하는 자칭 군사 강국으로서의 면모에 식량부족 사태는 큰 부조화가 아닐 수 없다. 휴전선을 사이에 둔 한국이 쌀 소비가 해마다 줄어들고, 연간 570만 톤에 이르는 음식물을 쓰레기로 버린다는 통계가 나오는 것과 대비된다.

식량난은 북한 경제의 실상을 함축하는 말이다. 곡물과 달러(외화), 유류(에너지) 등을 포함하는 ‘3난(難)’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식량난이란 단어의 앞에는 ‘만성적인’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북한의 식량부족과 주민들의 굶주림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란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할아버지이자 국가주석인 김일성은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 살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3대에 걸쳐 70여년 통치를 이어오는 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2011년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아들인 김정은 국무위원장(당시 직책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후계 권력을 넘겨받았다. 그때 27살이던 청년 지도자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으며 우려를 제기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지만 기대도 적지 않았다. 10대 시절 서방 유학(스위스 베른 국제학교)을 하고 바깥세상을 경험한 젊은 지도자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다를 것이란 생각에서다. 

김정은 시대의 출발은 이전과 차별화됐다. 평양 시내와 외곽에는 우리 뉴타운 성격의 주상복합 및 아파트단지와 거리가 조성됐고, 화려한 조명과 네온사인이 밤을 밝혔다. 피자와 팝콘, 아메리카노 등을 파는 식당과 카페가 들어섰고 현대적인 인테리어 시설과 상품을 갖춘 광복거리상업중심(엣 광복백화점)을 비롯한 마트와 상점이 문을 열었다. 먹는 문제의 해결을 넘어 개혁·개방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듯이 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최고지도자의 현장 방문을 의미하는 이른바 ‘현지지도’를 주기적으로 벌인 김정은 위원장의 통치코드는 ‘인민생활 향상’에 초점이 맞춰졌다. 밀짚모자를 쓴 채 논두렁에 나가 벼 이삭을 뽑아 들고 농업담당 간부들과 대화하는 모습이나 수산물 사업소에 쌓여있는 생선을 살펴보며 환하게 웃는 장면은 관영 보도 매체의 단골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이런 선전·선동성 보도나 북한의 주장은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이나 탈북 인사들이 전하는 실상과 큰 차이가 났다. 세계식량계획(WFP)을 비롯한 유엔 산하 기구나 평양에서 활동해온 인도주의 단체는 여전히 북한 주민 2,500만 명 가운데 40%가량이 만성적인 굶주림에 노출돼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 6월 내놓은 ‘북한 2020/21 식량 공급과 수요 전망’ 보고서에서 올해 식량 부족분이 106만3,000톤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 당초 계획대로 20만5,000톤의 식량을 수입·조달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85만8,000톤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이는 북한의 2, 3개월 치 식량에 해당한다는 게 FAO의 진단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북한이 지난해 봄 가뭄과 농업 관련 자재·장비의 부족, 태풍과 수해 등의 여파로 135만 톤의 식량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주목되는 건 최근 들어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식량 문제의 심각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6월 15일 평양에서 개막한 노동당 제8기 3차 전원회의에 참석해 “지난해 태풍 피해로 알곡 생산계획에 미달한 것으로 해 현재 인민들의 식량 형편이 긴장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김정은 위원장이 선봉에 선 형국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곡물 생산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고 식량난을 해결하는 솔루션을 찾기는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는 게 전문가 그룹과 관계 당국의 분석이다. 식량 생산 부진이나 영농 기술의 낙후성, 만성적으로 되풀이되는 곡물 부족사태는 농업 분야에 한정된 게 아니라 북한 경제 전반의 총체적 난국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란 점에서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식량부족 문제를 거론하고 대책에 부심하는 건 이 사안이 자칫 자신의 리더십에 손상을 가할지 모른다는 판단으로 보인다. 젊은 지도자의 등장에 기대를 모았던 엘리트와 주민이 식량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체제에 등을 돌린다는 건 심각한 상황이다. 

마침 오는 12월은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지 10년이 되는 시점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마음이 다급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6월 중순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이례적으로 “인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겠다”는 취지의 ‘특별명령서’를 내린 것도 이런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조짐은 좋지 않다. 북한에도 닥친 폭염은 곡창지대인 황해남도 등을 타격했고, 노동신문은 지난 7월 26일자 보도에서 “여러 지역에서 옥수수밭과 콩밭이 깊이 5∼20㎝까지 마르고, 그 이하의 토양도 습도가 30∼50%에 그치는 등 가뭄 피해 면적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쌀이 곧 공산주의’란 말은 오랜 기간 북한 체제를 지배한 구호 중 하나였다. 최근 공산주의를 사회주의로 슬쩍 바꾸기는 했지만, 식량 생산이 제대로 이뤄져야 사회주의 체제를 지킬 수 있다는 북한 최고지도자와 노동당 집권 세력의 인식을 담고 있는 문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은 이런 선동 구호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까지 나서 식량부족을 호소하면서도 근본적 해결책 없이 당 간부와 농업 관계자, 농민을 닦달해서는 문제가 풀릴 수 없다. 더욱이 굶주리는 주민을 방치하면서 ‘애민(愛民) 정치’를 외치고, 최고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강조하는 건 모순이다.

자력갱생을 내세워 외부로부터의 식량 조달이나 지원까지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장 문제 해결이 어렵다면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외부로부터의 식량 조달도 검토돼야 한다. 마침 한국 정부가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물꼬를 다시 트기 위해 식량과 코로나 백신 등의 대북제공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고, 미국 등 관련국과의 협의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코로나로부터 선수 보호’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도쿄 올림픽에도 참가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도의 고립 상황을 맞고 있는 북한 입장에서 이것저것 따질 게 없어 보인다. 배고픔에 이어 코로나 공포에까지 노출된 주민의 형편을 우선적으로 헤아리는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