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남북 간 소통이 그리운 요즘이다. 인간관계나 사회 조직은 물론 체제·국가 사이도 서로의 소식을 묻는 일이 뜸해지고 소원해지면 영 재미가 없어진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이따금 기별을 띄우거나, 지키지 못할 줄 알면서도 “조만간 식사 하시죠”라고 인사치레를 건네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공백이 길어지면 서먹해지는 건 물론이고 자칫 오해가 생겨나고 불신이 커질 수 있다. 서로 묵은 감정이 켜켜이 쌓여있는 사이라면 더욱 위험하고 이념과 체제가 다른 경우 분쟁이나 무력충돌로 번질 공산도 크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3년 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의 대장정의 물꼬를 트며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수준으로까지 치달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북미 관계의 헝클어진 틀 속에 함몰되는 운명을 맞았다. 

곧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 속에 시간이 적잖이 흘렀지만 예상 밖으로 회복 시간이 더디다. 문재인 정부가 복원을 위한 노력에 골몰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듯하다. 가까스로 지난 7월 말 이어졌던 남북 간 통신연락선도 다시 끊긴 걸 보면 뭔가 남북 당국 간에 감정의 골이 깊어 보인다. 한미 합동군사연습이 이유라는 분석도 있지만 남북 정상 간의 믿음이 두텁다면 문제될 턱이 없다.

“선제타격 능력을 강화하는 데 박차를 가하겠다”는 북한 최고지도자 여동생의 담화나 “시시각각 안보위기를 느끼게 해줄 것”이란 그 수하의 대남위협을 접하면서 남북 간 소통의 긴요함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불만과 불편한 감정을 공식·비공식 대화 채널을 통해 주고받는 대신에 일방통행식 퍼붓기로 분풀이는 하는 모습에 대한 안쓰러움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군사연습을 빌미로 남북 간 긴장을 고조시키는 무력도발을 벌이거나 인명을 살상하는 퇴행적 행태를 보이는 수준으로까지는 내달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언제, 어디서 북한이 도발 본능을 드러낼지 알 수는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행보를 예측하기 쉽지 않다는 건 지난해 6월 개성공단 내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 사태에서 목도한 바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남북관계를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 분쟁이 없는 ’소극적인 평화‘상태에 머물거나 안주하기에는 한반도 주변 정세와 남북관계의 현실이 너무 절박하기 때문이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현 상황에 머물며 방치하다시피 하다가는 작은 불씨가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의 뜻과 달리 사태가 흘러갈 수도 있다. 적극적인 상황 및 위기관리를 위해 무엇보다 소통 채널의 회복이 절실한 이유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남북 정상회담이나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같은 대형 이벤트는 아니더라도 남북관계의 정상 궤도 진입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복잡하게 얽힌 남북관계를 쾌도난마식으로 푸는 마법의 지팡이는 없다. 하지만 그 동안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서로의 얼어붙은 마음을 풀고 대화를 위한 입을 떼게 하는 수순은 있다. 그 첫 도약대는 바로 ’인도적 협력‘이다. 협력이라고는 하지만 주로 우리가 북한에 식량이나 비료를 지원하거나 어려운 형편을 도와줄 수 있는 물품을 보내는 일이다. 

물론 북한도 그에 상응하는 인도적 차원의 답례품이 있다. 바로 이산가족 상봉이다. 인도적 사안이란 성격 때문에 식량·비료와 이산상봉을 맞바꾸는 듯한 모양새를 가급적 피하려 하지만 결국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사안을 풀어낸다는 점에서 ‘협력’이란 표현으로 남북 합의서에 담기게 되는 것이다.

마침 북한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야가 적지 않다. 식량부족 문제의 경우 김정은 위원장도 올 초부터 그 심각성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면서 대책마련에 부심해 왔다. 북한 주민의 40%가 만성적인 기아에 노출돼 있다는 국제기구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긴급 구호형태의 지원 사업 재개가 필요하다. 

또 코로나19와 관련한 지원 방안도 북한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분야다. 백신 국제 공동구매 프로젝트인 코백스(COVAX)는 지난 3월 북한에 대해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199만 2,000회분을 배정했고, 8월 중에는 중국산 시노백 백신 297만회분 지원 계획을 세웠다. 당초 방안대로라면 지난 5월까지 북한에 약 85만 명이 접종할 백신 170만4,000회분이 전달됐어야 하는 데 아직 공급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인해 북한에 대한 지원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한미 간에 정책변화의 기류도 감지된다. 지난 23일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과 미국의 성 김 대북특별대표가 만난 자리에서는 보건과 감염병 방역, 식수·위생 등에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협력을 벌이는 방안이 논의됐다고 한다.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를 통한 대북지원도 다뤄졌다고 하니 한국 정부가 식량·백신 등을 직접 혹은 국제기구를 통해 지원하는 방안이 추진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문제는 대북지원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어떻게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대남 비난담화나 연락사무소 폭파 같은 도발적 언행에 우리 국민의 감정은 많이 상해 있는 게 사실이고, 코로나19 백신의 경우 국내 수급에도 문제가 있는데 북한에 보내는 데 따른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런 국민 여론을 살피고 대북지원에 대한 설득과 지지여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산가족 상봉이라 할 수 있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한 13만3,475명의 실향민 중 이미 8만5,898명이 이산의 한을 풀지 못하고 숨졌고, 4만7,577명이 생존해 있다. 그런데 생존자 가운데 80세 이상 고령자의 비중이 66.3%에 이른다. 그만큼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라는 얘기다.

그동안 이산가족 상봉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과 추석, 또는 8.15 광복절 등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경축일을 계기로 열렸다. 때마침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상봉 신청자를 추첨해 명단을 교환하고 생사확인 등을 통해 대상자를 선발하는데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남북 당국이 의기투합해 서두른다면 가능하다. ‘추석 계기 상봉’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일이 촉발하면 때를 좀 넘기더라도 상봉행사를 치르면 된다. 

2018년 이후 중단된 이산상봉의 감격이 다시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면 대북지원을 위한 국민 여론도 한결 따뜻해질 수 있다. 또 북한 당국도 대북 식량·백신 지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이 넓어질 공산이 크다. 향후 남북관계의 향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이산가족 상봉의 성사를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과 북한의 호응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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