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사람 가운데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자꾸 늘어난다. 서로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 사진=픽사베이
이 많은 사람 가운데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자꾸 늘어난다. 서로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 사진=픽사베이

1. 지하철을 탔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내릴 터라 앉아도 좋고 서서 가도 좋은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경로석을 봤더니 두 사람이 앉았고, 가운데 자리에는 배가 빵빵하게 차오른 제법 큰 배낭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앉은 사람 중 하나는 체수가 줄어들어 차려 입은 옷이 헐렁하게만 보이는 바짝 마른 영감님이고 다른 하나는 사이클 타는 사람들처럼 몸에 쫙 달라붙는 형광색 운동복-위는 녹색, 아래는 검은색-을 입었는데 배낭처럼 빵빵한 몸피에 스포츠머리를 한, 기껏해야 내 나이쯤의 사내였습니다. 앞 칸과 연결된 문가에는 얼굴과 몸이 쪼그라든 노인 한 분이 피곤한 듯 기대어 서 있었습니다. “저 노인이 저 배낭 때문에 앉지를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서서 상황정리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서 있는 사람이 자리에 놓인 짐-배낭이든 쇼핑백이든 가방이든-앞으로 다가가 좀 앉겠다는 표시만 해도 짐주인은 자기 무릎 위로 끌어갑니다. 간혹 언짢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지만 진짜 민주시민, 배려하는 사회의 주인공은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짐을 치워줍니다. 어 그런데, 어제 그 사나이 보통 아니었습니다. 진짜 강적이었습니다. 내가 배낭 좀 치워달라고 하자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코로나19 때문에 옆자리 비워놔야 하는 거 모르쇼?” 이러는 겁니다. 잠시 ‘어이를 상실’했던 나는 “저 사람들은 붙어 앉아 있잖아요? 안 보여요?”라며 7명씩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더니 이 작자, “저 사람들은 저 사람들이고 나는 안 붙어 앉습니다”라고 너무 당당하게 대꾸를 합니다. 전혀 예상 못한 반응에 할 말을 잃어버린 나에게 배낭 옆에 앉아 있던 영감님이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일어섭니다. 맞은편 경로석에서도 할머니 한 분이 “여기 앉으세요”라면서 일어납니다. 상식 없는 자를 혼내고 반성시키려다가 내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것 같아 앞 칸으로 건너갔습니다. “저런 인간 다시 안 보려면 내가 가만있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2. 몇 주 전 일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아내와 동네 개천 길 산보나 하려고 나섰습니다. 개천으로 내려가려면 일방통행로를 잠깐 걸어가야 하는데, 대형마트 주차장 후문과 연결된 그 길은 비좁아서 차들이 많이 다니지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갑자기 바로 뒤에서 자동차 경적이 “빵” 울렸습니다. 한 20미터 더 가면 오른쪽에 나타나는 마트 주차장 진입로로 들어가려는 차였습니다. 갑작스러운 경적 소리는 “나 바쁘거든. 마트 들어가려는데 왜 앞에서 어기적거리느냐? 빨리 비켜! 비키라구!” 이거였습니다.

그 전에도 이 길에서 벤츠 탄 아줌마가 누른 경적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기분을 몹시 잡친 적이 있는 나는 몸을 홱 돌려 밤이라 보이지도 않는 운전석을 향해 “왜 좁은 골목에서 경적을 누르고 난리냐? 몇 미터 남았다고 사람 놀라게 하냐, 창문 열고 좀 비켜주세요 말 못하냐”라고 벤츠 아줌마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것까지 합해 있는 말 없는 말 나오는 말 모두를 막 퍼부었습니다.

이번엔 아저씨였습니다. 아니 나 같은 영감이었습니다. 이 영감,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아니, 클랙슨 한 번 눌렀다고 너무 심한 거 아니오? 그거 한 번 양해 못하시오?”라며 오히려 나를 꾸짖습니다. 그래서 서로 높은 소리를 주고받다가 다른 산책객들이 뜯어 말리는 통에 서로 갈 길을 갔지만, 20미터 서행하는 것도 못 참아 클랙슨을 울리고, 그러지 말라는 나에게 “그거 한 번 양해 못하냐?”고 질책하던 그 영감. 이제는 걷는 사람 뒤에서 클랙슨 누르는 버르장머리를 고쳤나 모르겠습니다.

3. 늦게 서울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 외곽에 있는 집으로 오던 어느 늦은 밤. 제일 뒤, 다섯 명이 앉는 자리 가운데 앉았는데, 옆자리 세련된 옷차림과 머리모양, 관록을 드러나게 하는 검정 뿔테 안경, 하얀 와이셔츠, 짙은 감색 양복 차림의 장년-직장인이라면 부장 아니면 차장일-이 전화기를 꺼내 아내인 듯한 사람과 통화를 합니다. 얼굴에 주기가 약간 있던 그의 통화는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눈치를 주는데도 계속됐습니다. 바로 옆에서 견디다 못한 내가 “조금만 소리 낮춰주시죠”라고 했더니 이 부장님은 나를 쳐다보면서 “선생님은 일 분도 못 참으시는군요”라고 한마디 ‘투척’하고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광역버스 안 풍경 하나 더 전하겠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건데요, 역시 늦은 밤 귀가할 때였습니다. 내 앞자리에는 나보다 나이 많은 부부, 둘 다 잘 차려입은 걸로 봐 결혼식 같은 즐거운 가족행사나 좋은 사람들과 품격 있는 저녁 자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지 싶었습니다. 그 부부 자리 옆 통로 건너 좌석에도 나이 지긋한 분이, 아마도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계셨습니다. 조용하기만 한 밤 버스 속에서 갑자기 전화 벨소리가 울리더니 앞자리 부부 중 부인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부인은 “나 교양 있어요”라는 말투로 통화를 했지만 그게 좀체 끝나지 않으니 교양이고 뭐고 짜증이 날 정도가 됐습니다. 결국 통로 건너편에 앉았던 분이 “조금 조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교양적 태도를 보였던 사람답게 바로 통화를 끝냈는데, 그 남편이 나섭니다. “당신 뭐야, 우리 집사람에게 뭐하는 짓이야?”라고 삿대질을 합니다. 다음 장면은 남정네 둘의 옥신각신. 늦은 밤 광역버스에서는 이런 일이 가끔 벌어집니다. 그런 사람 있는 버스는 안 타려고 하는데 그게 내 맘대로 되나요.

4. 글이 길어지는데, 이런 글에 꼭 써야 하는 사람이어서 마저 쓰겠습니다. 두어 달 전에 2층 사는 우리 집 인터폰-세대끼리 통화하는 전화기-이 울렸습니다. 아내가 받았습니다. 하도 기막힌 일이라 아내는 아직도 통화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여자는 “여보세요”라는 말조차 없이 “담배 그만 피우세욧!”이라는 거친 말로 시작했습니다. 이어진 대화는 아래와 같습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 없는데요?”
“피우세요. 피우신다고요”(흡연자가 우리 집에 있다는 확신의 목소리!)
“안 피운다니까요.”
“피우세요. 피우세요.”
“우리 집에 와보세요, 담배꽁초 하나 있나 찾아보시라고요!”
“담배꽁초를 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여튼 우리 아저씨 안 피운다고요. 왜 우리가 피운다고 생각하세요?”
“3층에 물어봤더니 자기네도 흡연 피해자라고 하던데요?”
“여보세요, 그런다고 우리가 피우는 증거가 돼요?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하세요?”
“내가 봤다고요, 새벽에 그 집 아저씨 바깥에 나가는 거 봤다고요.”
“그게 무슨 증거예요?”
“담배 피러 나가는 거잖아요?”
“여보세요, 우리 아저씨 새벽에 나가는 거 등산 가는 거라고요. 새벽에 밖에서 담배 피우면 집 안에서 담배냄새가 왜 나겠어요? 그건 그렇고, 거기 몇 층이에요? 몇 층 사는데 이렇게 막무가내, 무데뽀예요?”
(대답 없음.)
“이렇게 무데뽀로 누명을 씌우면서 몇 호라고 안 알리느냐, 도대체 몇 호예요?”
(대답 안 하다가) “405호예요.”
“우리 아저씨가 담배를 피우면 내가 이렇게까지 펄펄 뛰겠냐. 사과하세요. 당장.”
“담배 안 피우면 사과할게요.”
“담배 안 피우면 사과할게요”라는 조건부 사과에 화가 더 솟구친 아내가 4층으로 뛰어올라가려는 걸 제가 겨우 뜯어말렸습니다. 같은 라인에 사니까 오며 가며 얼굴을 봤을 가능성이 큰 이 아줌마는 ‘만나기 싫은 사람’이 아니라 ‘기억하기 싫은 사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나라 망치고 국민 분열시키는 일만 하는 정치인 몇몇과 그 언저리 인물들 욕하는 것만으로 바빠서 행실 나쁜 개인들 욕할 시간은 없는데, 그런 개인이 자꾸 늘어나는 것 같아 그런 사람들 이야기만으로 쓴 글입니다. 밝고 아름다운 사회를 망가뜨리는 게 삶의 목표인 듯한 이들, 정말 만나기 싫은 이 사람들이 특정 인물의 좌표를 찍고, 문자와 댓글로 양념질 하는 사람들 아닌가 싶습니다. 내로남불, 책임 떠넘기기, 막무가내, 억지, 뻔뻔함, 덮어씌우기 같은 짓을 하는 게 그렇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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