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인 ‘문해’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다. 하지만 시력이 약하거나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문해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음성도서'는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열쇠가 되고 있다./ 그래픽=박설민 기자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문자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인 ‘문해’는 인간의 삶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설령 각 국가끼리 사용하는 문자가 다르더라도 인간 문명의 모든 부문에서 문자가 빠지는 곳은 단 한 부분도 없다. 특히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이다’ ‘디지털 시대다’ 하는 현대 정보사회에서 문자의 역할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처럼 정보의 중요성은 날로 커져가면서 문자의 중요성도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이때, 누구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일반 문자로 구성된 책과 문서들을 읽을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이다. 

설령 점자 문서가 보급된다 하더라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점자조차도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2017년 발간한 ‘장애인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약 30만명의 시각장애인 중 86%가 점자를 독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시각장애인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디지털 음성도서’라고 볼 수 있다. 기존 문자로 구성된 텍스트를 음성 문서로 변환한 디지털 음성도서를 이용하면 시각장애인들도 소설책부터 전공 관련 전문서적까지 귀를 통해 읽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제작된 점자 문서나 음성 문서 등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디지털 음성도서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조금이나마 고취하고자 디지털 음성도서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해보았다.

디지털 음성도서 제작을 위한 문서 작성 양식. 데이지 전환 프로그램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띄어쓰기부터 글자, 행까지 정해진 서식대로 입력해야 한다./ 사진=삼성디스플레이 사회공헌단 제공

◇ 별 것 아닌 줄 알았는데… 한 달 간의 문서 타이핑 ‘대장정’

사실 디지털 음성도서를 제작하는 과정에 참가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연히 삼성디스플레이 사회공헌단과 서울점자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제2기 함께 View’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함께 View’ 봉사활동의 내용은 간단했다. 자신이 원하는 책을 한 권 고르고, 이를 한글 프로그램이나 워드 프로세서를 이용해 규칙에 따라 타이핑하면 되는 것이었다. 기간은 8월 1일부터 31일까지, 총 31일의 시간이 배부됐다. 

심사숙고 끝에 고르게 된 책은 신시아 브라운의 ‘세상이 궁금할 때 빅 히스토리: 빅뱅에서 당신까지’였다. 약 400페이지의 나름 짧은(?) 분량의 페이지에 글씨도 컸고 평소 관심 있는 과학 분야였기에 쉽게 작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얻어맞기 전까지는”이라고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이 그랬던가. 이 말은 곧 현실이 됐다.

한 달의 긴 작업 시간까지 제공됐기에 작업을 시작하기 전 하루에 약 15페이지 정도를 작성하면 매우 편하고 쉽게 타이핑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자 본연의 업무인 취재 및 기사작성과 병행하는 것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녹초가 돼 퇴근한 후 책상 위에 놓여있는 빅 히스토리 책을 보면서 ‘에이 내일 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루하루 미루면서 하루에 15페이지씩 타이핑하자던 계획은 ‘20페이지’ ‘30페이지’로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중간 중간 주말에 1~3페이지 정도를 작업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번 정도의 작업을 통해 완성한 분량은 처음 하루 목표로 잡았던 ‘15페이지’ 분량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원래 책을 구매하면 거의 읽지 않았을 ‘작가의 말’ 부분 정도를 완성하는데 그쳤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긴 시간 게으름을 피우다보니 봉사 활동 종료까지 남은 기간은 5일로 좁혀졌고, 남은 작업 분량은 380페이지에 육박했다. 20년 만에 방학숙제가 잔뜩 쌓여 초조했던 초등학교 방학 끝자락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여기에 책의 본문을 작업하기 위해 들어서자 프로그램을 거쳐 문서의 디지털 음성화하기 위해 띄어쓰기 및 입력 방식이 그동안 해왔던 단순 문서 작업과 사뭇 다른 것도 시간을 지연시키는 요인이었다. 사진 및 그림의 경우 대강의 묘사나 설명 등을 적어야 했으며, ‘과학책’을 선택한 관계로 다양한 단위와 이공계 용어들도 쏟아져 나와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로 투덜거릴 시간은 없었다. 그동안의 게으름이 안겨준 거대한 숙제의 마무리를 위해 하루 100페이지가 넘는 타이핑 작업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8월 29일 새벽 4시, 생략 가능한 용어 설명 파트를 제외하고 431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텍스트를 모두 타이핑하는데 성공했다. 

실제 도서를 디지털 음성도서 전환을 위한 방식으로 타이핑한 모습. 작성한 책은 신시아 브라운의 ‘세상이 궁금할 때 빅 히스토리: 빅뱅에서 당신까지’다./ 사진=박설민 기자 

◇ 완성된 책문서, 시각장애인 위한 ‘데이지’로 다시 태어난다

한 달 간의 대장정(정확히는 마지막 일주일간) 끝에 완성한 빅히스토리 책 문서 파일을 삼성디스플레이 사회공헌단 측에 전송한 후 마음은 홀가분해졌지만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이렇게 고생해서 만든 텍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디지털 음성 도서로 재탄생하고, 시각장애인들에게 전달되는지 말이다.

해당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이번 봉사활동을 삼성디스플레이 사회공헌단과 함께 주최한 서울점자도서관 측에 문의를 했다. 도서관을 방문해 디지털 음성도서로의 전환 과정을 살펴보고 싶었으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거리두기로 인해 직접 방문은 할 수 없었으나, 서울점자도서관 측의 자세한 답변을 받을 수는 있었다.

서울점자도서관 측 설명에 따르면 자원봉사자들이 제작한 파일은 오탈자 및 문자 오류 등의 내부 검수 과정을 거친 후 ‘데이지 도서’로 제작된다고 한다. 여기서 ‘데이지(DAISY)’는 ‘Digital Accessible Information System: 디지털 접근 정보 시스템)’의 약자로 디지털화한 음성 녹음물과 모든 정보를 함께 제공하는 디지털 음성정보시스템을 말한다. 

특히 데이지는 시각장애인이나 문맹 등을 위한 국제 디지털 문서 포맷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디지털 음성도서를 만드는데 중점 기술로 이용되고 있다. 데이지로 제작된 디지털 음성 문서 및 도서는 일반 책과 마찬가지로 목차 및 차례, 페이지까지 구분돼 이를 이용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원하는 문서 부분을 손쉽게 찾아서 읽을 수 있다. 또한 50시간 이상의 데이터 저장이 가능하고, 디지털 방식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음질의 변형이 없으며, 속도 조절도 가능하다.

서울점자도서관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서울점자도서관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보내준 한글 문서를 마이크로소프트 워드(Word)와 텍스트 문서를 데이지 전용 포맷으로 전환해주는 DAISY Pipeline 프로그램을 이용해 디지털 음성 도서를 만들고 있다.

완성된 디지털 음성 도서는 데이지를 재생할 수 있는 포맷을 통해 이용가능하다. 재생을 위해서는 데이지 전용 단말기인 △책마루 △한소네와 같은 단말기가 필요하다. 또한 국가대체 자료 공유시스템(DREAM)과 같은 스마트폰 등의 모바일 단말기 및 PC용 데이지 리더 등을 통해서도 시각장애인들은 디지털 음성 도서를 이용할 수 있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데이지 포맷 기반의 디지털 음성도서는 '넓은마을' 등 시각장애인 전용 도서플랫폼을 통해 제공된다. 사진은 넓은마을 전자도서관 카테고리에서 디지털 음성도서 파일을 이용하는 모습./ 사진=서울점자도서관 제공 

◇ 디지털 음성도서는 어떻게 시각장애인들에게 공급될까

이렇게 자원봉사자들과 점자도서관 전문가들의 노력을 거쳐 만들어진 디지털 음성도서는 ‘넓은마을’과 ‘행복을 들려주는 도서관’이라는 시각장애인 전용 온라인 도서관에 업로드 된다. 

‘넓은 마을’과 ‘행복을 돌려주는 도서관은 전국시각장애인들의 보다 유익하고 편리한 정보문화생활을 위한 재활정보 통신망 서비스다. 해당 사이트들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전자도서관‘ 카테고리에서 제작된 디지털 음성도서 파일을 다운받아 앞서 소개한 책마루, 한소네 등의 데이지 전용 단말기를 통해 도서를 읽을 수 있게 된다. 기자가 만든 디지털 음성도서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해당 사이트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용사이트로 시각장애인만 접속 가능해 접근할 수는 없었다.

서울점자도서관 한지원 사서는 “서울점자도서관에서는 도서관 홈페이지에 도서목록을 업데이트하거나 이용자분들께서 유선 상으로 문의하실 때 넓은마을과 행복을 들려주는 도서관에서 도서를 이용하실 수 있도록 안내 드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서울점자도서관 측은 최근 자원봉사자들의 모집이 힘들다는 점이 아쉽다고 밝혔다. 코로나19로 인해 자원봉사자들의 모집이 중지된 지 오래된 상태라는 것이다.

한지원 사서는 “많은 전자도서들이 자원봉사자분들의 도움으로 제작이 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코로나19 확산 사태로 인해 기존 매월 30명씩 모집하던 자원봉사자 모집이 중지된 지 오래된 상태”라며 “이로 인해 전자도서 자원봉사자 모집에 대한 봉사자들의 문의가 계속 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하여 온라인으로 교육을 실시할 방법을 내부적으로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 서울점자도서관에서는 하루빨리 자원봉사자 모집을 재개 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라며 “기존 자원봉사자 모집 이외 다른 계획은 없는 상태입니다. 추후 자원봉사자 모집 재개 시 1365 홈페이지와 서울점자도서관 홈페이지에 재개 안내 공지를 올릴 예정”이라고 전했다.

봉사활동 시작 전에 만만하게 여겼던 것과 달리 디지털 음성도서의 제작 과정은 엄청나게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또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일하는 분들이 큰 열정과 자부심이 없다면 누구도 결코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살면서 진행해본 어떤 자원봉사활동보다도 뿌듯한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정보화 시대, 불편한 삶을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 분들을 위해 무언가 돕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디지털 음성도서 만들기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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