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내로라는 항공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10년 전 집권한 직후부터 공군 부대를 집중적으로 방문해 조종사들을 만나거나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고, 전투기 앞에서 조종사들과 개별 사진을 찍는 모습도 빈번했다. 직접 전투 비행기의 조종간을 잡기도 했다. 관영매체를 통해 공개한 동영상을 보면 주 조종사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체험에 참가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소형 무선조종 항공기를 이용한 시범 행사를 어린이와 학생 등과 함께 관람하는 장면을 연출하거나 강원도 원산비행장에 외국인을 초청해 북한이 보유한 민항기와 군용기 등을 총동원한 에어쇼를 개최한 적도 있다. 당시 방북했던 서방의 항공 전문가나 관광객들은 이미 단종된 노후 기종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열광했다고 한다.

낙후된 시설로 버스터미널만도 못하다는 평을 받던 평양의 순안국제공항을 리모델링하는 사업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수차례 공사 현장을 둘러본 김정은 위원장은 공항 내부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공사 총책임을 맡은 마원춘 국무위원회 설계국장을 한동안 북부지역 농장으로 가족과 함께 추방하는 책벌을 가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 공항을 방문한 김정은은 “때벗이를 했다”며 반색했다. 

북한의 국적 항공사라 할 고려항공에 신형 여객기를 도입하고 항공 승무원들의 복장이나 헤어스타일 등을 서방 항공사를 본 뜬 모양새로 혁신한 것도 모두 항공 분야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타고 다닐 전용기인 ‘참매’ 시리즈를 신형 기종으로 교체한 것은 물론이다.

내친 김에 항공 관련 조직체계도 개편하겠다는 마음을 굳힌 듯하다. 고려항공의 운항을 총괄하는 기구를 국가항공총국으로 개칭한 것도 이런 차원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달 29일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우리의 국회에 해당) 제14기 5차 회의에서 이런 결정이 이뤄졌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회의는 다섯째 의정을 토의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결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려항공총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항공총국으로 함에 대하여’를 전원찬성으로 채택하였다”고 보도했다. 명칭에 ‘국가’라는 표현을 넣음으로써 김정은 체제 들어 가속화 해온 이른바 국가성 제고에 공을 들이는 모습을 자신이 관심 갖는 항공분야에도 적용하겠다는 뜻이 읽혀진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항공분야에 대한 관심이나 물적·행정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는 게 현실이다. 과거 필자가 방북 취재과정에서 타 본 고려항공은 오랜 경제난에 시달려온 북한의 어려운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승무원이 “선생님, 자리에선 걸상띠를 매야합네다”라고 하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 했지만 좌석 앞 흰색 아크릴 판에 ‘걸상띠를 매시오’라고 새겨진 검은색 글자를 보고 안전벨트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니 상당수 자리에는 안전벨트가 없거나 제대로 사용하기 힘든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다. 또 좌석 밑에 있어야할 구명조끼는 대부분 사라진 상황이었다. 구 소련 시절 도입해 내구연한을 넘긴 항공기가 대부분이다 보니 발생한 문제다.

서비스도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 베이징 국제공항을 이륙한 항공기가 정상궤도에 오르자 승무원은 그 날 발행된 노동신문과 선전화보 ‘조선’을 내밀었다. 승객의 편안함보다는 선전 대상이란 생각이 앞서는 듯했다. 

잠시 뒤에는 빵과 녹두전, 김치 등이 어우러진 기내식이 올랐다. 한식과 양식이 결합된 퓨전 식사였다. 여기에 중국제 오렌지주스 한 잔이 곁들여졌다. 후식으로 사탕알 만한 동그란 풍선껌이 제공됐다. 최근 들어 햄버거나 김밥이 제공되는 등 개선이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고려항공 기내식은 세계 각국 여행을 즐기는 관광객들 사이에 악명 높고, 유튜브나 SNS 등에는 사진자료와 관련 글이 오르고 있다.

순안공항 리모델링이 김정은 위원장의 업적이란 식의 북한 찬양 보도가 이어지는 시점에 서방 매체에서는 고려항공의 문제를 지적하는 여론이 잇달아 대두했다. 세계 최대의 공항 및 항공사 서비스 평가기관인 영국의 스카이트랙스는 고려항공 탑승객을 대상으로 공항시설과 기내 서비스 관련 56개 부문에 걸쳐 설문조사한 결과를 내놓았다. 고려항공이 전 세계 600여개 항공사 가운데 최저점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또 유럽연합(EU)은 북한 고려항공의 EU 역내 운항 제한 조치를 유지하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세계 20개국 231개 항공사의 EU 역내 취항이 금지됐고, 북한 고려항공을 포함한 8개 항공사는 운항 제한 항공사로 지목됐다.

국제사회로 통하는 관문인 평양 순안국제공항을 새 단장하고 행정조직 개편 등 이런저런 채비를 하고 있지만 아직 김정은 체제는 개혁이나 개방으로 나서기 어려운 상황인 듯하다. 특히 지난해 초부터 코로나19 여파로 해외로 연결되는 항공로를 전면 차단하면서 국제민항 수요나 운행은 전무하다고 봐야 할 지경이다. 지구상 항공운항을 보여주는 앱을 통해 들여다봐도 북한 지역 상공을 날아다니는 항공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다 평양과 동해안 쪽 강원도 원산을 오간 항공기의 궤적을 추적해보면 김정은 위원장의 전용기 운항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드러난다는 게 정보 당국자의 귀띔이다.

문제는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는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북한의 민간항공 운항이 다시 예전처럼 재개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근본적인 문제인 북한 체제의 폐쇄성에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인해 점점 고립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평양 순안공항을 리모델링하고 원산 비행장을 현대식으로 확장, 개조한 건 방북객들을 겨냥한 것이고 무엇보다 북한을 관광하려는 사람들을 보다 많이 유치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하지만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김정은 체제에 대한 서방의 여론을 악화시키는 상황에서 아무리 관광객을 불러들이려 해도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방북했던 미국인 청년 오토 웜비어를 억류했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은 북한 체제와 인권 실태에 대한 불신을 고조시키고 ‘평양 관광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때마침 평양으로부터 종전선언이나 남북 정상회담 같은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저런 전제조건이 있다지만 김정은 위원장과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남북 대화 쪽으로 기류를 잡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 섞인 분석이 나온다. 코로나19에 대북제재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북한으로서는 뭔가 정책의 전환이나 돌파구 마련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판단을 했을 수 있다. 항공 마니아로서의 면모를 보여 온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그에 걸맞은 개방과 국제화의 결단을 행보를 보여줬으면 하는 기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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