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이 60년 영화 인생을 되돌아봤다.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
임권택 감독이 60년 영화 인생을 되돌아봤다.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

시사위크|부산=이영실 기자  

영화가 좋아서 그걸 좇으며 살았다.

임권택 감독은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뒤 102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서편제’(1993), ‘춘향뎐’(2000) 등의 수많은 작품을 통해 한국인의 삶과 정서를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아낸 그는 2002 칸영화제에서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2005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명예황금곰상을 받으며 세계 영화사에 이름을 뚜렷이 새겼다. 

첫 연출작을 시작으로 102번째 영화인 ‘화장’(2014)에 이르기까지, 60년간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며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거장’ 임권택 감독은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자로 선정되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은 매해 아시아영화 산업과 문화 발전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아시아영화인 또는 단체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임권택 감독은 영화제 개막 둘째 날인 7일 기자회견을 열고 취재진과 만나 자신의 영화 인생을 되돌아봤다. 한국영화계 ‘거장’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며 수많은 영화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그는 “이제는 영화와 스스로 멀어져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며 담담한 고백을 털어놨다.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다. 소감은. 
“누구나 받으면 좋은 것이 상이다. 나는 이제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에 출품해서 상을 받는 환경을 사는 건 아니다. 상을 받으면 격려가 되고 위안이 되고 노력할 수 있는 분발심을 갖게 되는 효과가 있는데, 나는 끝난 인생이라 ‘공로상’이라는 느낌으로 상을 받았다. 좋기도 하지만, 활발하게 영화인생이 남은 분들에게 가야 할 상이 아닌가 생각도 했다.” 

-‘끝난 인생’이라고 표현했지만, 차기작 계획은 정말 없나. 
“지금은 계획이 없다. 직업으로 삼고 평생 영화를 찍는 세월을 살다가 근래에 쭉 쉬고 있으니까, 더 하고 싶지 않냐는 질문인 것 같다. 그런데 이제 나는 영화와 아무리 친해지고 싶고 간절해도 스스로 멀어져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만들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 있다면. 
“무속을 소재로 한 영화를 찍지 못했다. 한국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 그 안의 무속이 주는 것을 영화로 찍어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기회도 없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사양하고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단계에 와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 영화계 살아있는 전설 임권택 감독.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
한국 영화계 살아있는 전설 임권택 감독.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

-‘취화선’ 칸 영화제 수상 이후 지금까지,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한국영화의 저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또 후배 감독들의 활약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는지.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방해를 받고 있지만, 극장에 가고 하는 심정이야 너 나 없이 다 가지고 있다. 좋은 영화만 양상 되면 언제라도 호황을 맞을 수 있는 게 한국영화라고 생각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를 보면 그 일에 종사하는 나 스스로도 짜증나는 허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런 허점이 거의 보이지 않고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한국영화에 대해 불만이 없다.” 

-최근 가장 재밌게 본 한국영화는 무엇인가. 
“재미를 추구하며 보는데, 근래에는 영화가 얼마나 완성도 높게 제작됐는가도 관심을 갖고 보고 신경이 쓰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영화도 이제는 세계적 수준에서 별로 뒤처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같은 영화는 상당히 완성도 높은 수준의 영화들이었기 때문에 탄탄하게 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영화 인생 중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을 꼽자면.  
“내 역량은 미치지 못하는데 큰 영화제에서 상을 타오길 기대하는 기대 심리와 압력이 있어서 조금 고달팠다. 그런 압박이 너무 쫓기면서 살게 만들기도 했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즐기면서 영화를 찍었어야 했는데 고통 안에서 작업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제가 나를 옥죄고 그랬다. 훨훨 살았다면 내 작품도 활기찼을 텐데 옹졸하게 어떤 틀 속에 있었다.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닌, 옆에 있는 (압력을 가한) 분들이 기여한 셈이다.(웃음) 그래도 잘 지내왔다. 기대를 보내는 이들에게 빚을 진 것 같았는데,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면서 조금 체면을 세우게 됐다.”

-가장 큰 버팀목이 된 동료가 있다면. 
“한 번도 칭찬을 안 했다. 꾸중을 많이 듣고 사는 우리 집사람이다. 처음 이런 자리에서 칭찬을 하고 싶다. 신세를 많이 졌다. 수입도 없어서 넉넉한 살림이 아닌데 잘 견뎌줬다. 아직도 감독으로 대우받고 살게 해준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자신의 영화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백두 편을 찍은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인데, 한마디로 얘기하라고 하는 것은 죽으라고 하는 얘기와 똑같은 말이다.(웃음) 영화가 좋아서 그걸 좇으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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