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북한전문 저널리스트
이영종 북한전문 저널리스트

“핵탄두를 1,000개 넘게 보유하던 공화국의 몰락이라니, 아무래도 핵은 절대 포기하면 안되갔구만…”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공화국을 전격 침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런 혼잣말을 했을지 모르겠다. 노동당과 군부의 핵심 간부들을 평양 집무실에 불러 모아 위성채널로 CNN보도를 함께 시청하면서 말이다. 핵 보유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체제 유지를 위해 관련 시설과 장비를 목숨으로 사수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공산도 있다.

소련 해체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1,272기의 핵탄두는 물론 이를 투발할 수 있는 170여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이 남아있었다. 세계에서 몇 번째로 꼽히는 핵 보유 국가였다. 하지만 4년 뒤인 1994년 우크라이나는 이를 모두 포기하고 러시아에 넘겼다. 핵을 갖지 않는 대신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체제 안전을 보장한다는 ’부다페스트 조약‘에 따른 결과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는 물론 영국과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이 이 조약에 서명하고 함께 보증을 섰다.

하지만 러시아는 20년 만인 2014년 크림반도를 침공해 강제 합병했고, 우크라이나와의 약속을 깨버렸다. 보증인 역할을 했던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의 도발을 막아서지 못했고, 러시아에 대한 제재도 푸틴의 행보를 제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다시 8년이 지나 수도 키예프가 공습 당했고 우크라이나의 주권은 짓밟혔다. 모두가 블라디미르 푸틴 체제의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김정은 위원장의 뇌리 속에는 또 하나의 사례가 스쳐갔을 수 있다. 핵을 포기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몰락한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다. 1970년대 파키스탄과의 기술 공유 등으로 비밀리에 핵 개발을 진행하던 리비아는 미국 등 국제사회와 갈등을 빚었고, 테러국으로 낙인찍히면서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졌다. 

결국 2003년 4월 비밀리에 영국을 통해 핵 포기 의사를 전달했고, 이듬해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에 가입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등 비핵화 절차를 밟았다. 2005년 11월 리비아의 핵은 완전 폐기됐고, 미국은 이듬해 리비아와 수교했다.

이로부터 6년 뒤, 카다피 정권은 무너졌다. 북한은 이를 두고 서방의 압박에 굴복해 핵을 포기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김정은 위원장도 리비아 사태와 관련해 “강력한 자위적 국방력을 갖추지 못하고 제국주의자들의 압력과 회유에 못 이겨 이미 있던 전쟁억제력마저 포기하였다가 종당에는 침략의 희생물이 되고만 발칸반도와 중동지역 나라들의 교훈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게 평양의 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이 2016년 1월 전한 내용이다.

카다피 정권의 몰락이 핵 포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불린 민주화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카다피의 독재통치와 권력욕이 종말을 자초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당시 리비아 국민들의 반정부 민주화 투쟁에 대해 카다피는 미사일까지 동원해 1,000여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했고 유엔 안보리가 나서 다국적 무력이 투입됐다. 정권 붕괴 후 피신을 다니던 카다피와 그 일당은 하수도에 숨어 지내다 시민군에 의해 처형되는 비참한 말로를 걸었다. 북한도 그 전말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이 같은 주장을 되풀이 하는 건 아무래도 핵 보유를 강변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핵 개발은 북한 체제 유지에 엄청난 부담을 안겼고,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었다. 대북제재로 인한 경제난은 북한 주민의 민생 뿐 아니라 엘리트 계층의 삶까지 피폐하게 만들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핵을 갖게 됐다”고 감격스러워하지만 거기에는 수백 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1990년대 말 이른바 ‘고난의 행군’의 아픔이 녹아있다.

이제라도 김정은과 그의 참모들이 냉철하게 상황을 짚어보고 체제 생존 전략을 짰으면 한다. 핵이 과연 북한에게 있어 어떤 의미가 있고, 김정은 정권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를 따져보라는 것이다. 

김일성 집권 시기부터 시작된 북한의 핵보유 야욕은 김정일과 김정은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커져만 갔다. 말로는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하면서도 발걸음은 핵 개발과 보유 쪽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가 국내총생산(GNI) 기준으로 50배 이상 벌어진 상황에서 북한은 핵을 ‘체제 수호의 보검’이라고 강변한다.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은 핵을 보유할 역량을 갖춘 국가만이 핵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핵 개발에는 △최고지도자의 의지 △적절한 기술력 △상당한 자금의 투입 여력 등 3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한다. 북한의 체제의 역량 중 상당부분을 핵 개발에 집중해 사실상의 핵보유국 주장이 가능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룰이나 제재‧압박을 견뎌내야 하는 더 큰 문제도 있다.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면 우크라이나처럼 갖고 있던 핵마저 내려놓아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실상을 북미 정상회담을 거치며 절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첫 대좌를 했을 때만 해도 전망은 밝은 듯 보였다. 하지만 노련한 사업가 트럼프는 녹록치 않았다.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영변 핵 단지 폐쇄를 내세워 대북제재 해제를 관철하려 했다. 그렇지만 트럼프는 “다른 핵 시설도 알고 있다”며 판을 깨버렸다. 그리고는 “김정은이 협상을 할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일갈했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대파국이자 국제 협상무대에서의 망신이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김정은 위원장은 국제사회의 패러다임이 급격히 바뀌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워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고 주변국과 정세를 쥐락펴락 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시대착오적이다. 세계 정상들은 코로나 공동대응을 위한 백신·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전기자동차와 배터리, 인공지능(AI)등 미래 인류의 생존을 가능할 첨단기술과 신수종 사업에 전력투구 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그런 논의 테이블의 어디에도 김정은 위원장이 설 자리는 없다.
  
핵을 체제 유지의 절대조건으로 여기는 북한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아무리 많은 핵을 보유한다 해도 결국 경제력이나 체제 역량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몰락은 필연이다. 핵은 갖는다고 무너지지 않는다고 보는 건 엄청난 착각이다. 연방 해체를 맞던 시기 소련이 보유한 핵탄두와 ICBM 등 미사일은 모두 7만 기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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