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서예진 기자 청와대와 윤석열 당선인 측이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말 인사권 문제와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 대선 직후 정권 이양 과정에서 대놓고 갈등을 벌이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다만 사태가 여기까지 온 것은 윤 당선인 측이 지나치게 강경하게 대응한 탓이라는 지적도 있다.
◇ ‘한국은행 총재’ 지명으로 격발된 갈등
문 대통령은 24일 윤 당선인을 향해 빠른 회동을 촉구하며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을 예방하는 데 협상과 조건이 필요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회동 조건으로 감사원 감사위원 인사권 등을 요구하며 문 대통령을 지속적으로 압박한 윤 당선인 측을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두 사람이 만나 인사하고 덕담 나누고 혹시 참고될 만한 말을 나누는 데 무슨 협상이 필요한가. 무슨 회담을 하는 게 아니다”라며 “다른 이들의 말을 듣지 마시고 당선인께서 직접 판단해주시기 바란다”라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윤 당선인 주변 참모들, 소위 ‘윤핵관’(윤석열 측 핵심관계자)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윤핵관’들이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 간 소통을 막고 있다는 의미다.
청와대와 윤 당선인 측은 전날 새 한국은행 총재 후보로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 지명 발표를 두고 진실 공방을 벌였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지난 23일 “당선인 측의 의견을 들어서 발표했다”고 했지만, 윤 당선인 측은 곧바로 “한은 총재 인사 관련해 청와대와 협의하거나 추천한 바 없다”고 반박했다.
실무협상을 한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도 “(이철희 정무수석이) ‘이창용 씨 어때요?’라고 하길래 내가 ‘좋은 사람 같다’고 한 것이 끝”이라며 이 후보자를 추천하거나 협의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리고 청와대가 인사 발표 직전에서야 일방적으로 발표 사실을 전했고, 막을 수 없었다는 게 장 실장의 주장이다.
그러자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협상 과정 일부를 공개하며 “장 실장에게 언론에 이름이 많이 등장한 한은 총재 후보 두 사람에 대한 의견을 물어봤다”며 “둘 중에 누구냐 물었더니 ‘이창용’ 이라고 (답을) 해서 이 후보자를 한 것(인사 절차를 진행한 것)”이라고 했다. 윤 당선인 측에서도 이 후보자에게 한은 총재직 수용 의사를 확인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발표했는데, 정작 당선인 측에서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 당선인 측, ‘패키지 인사’ 요구
아무리 정권이 교체됐다하더라도 이같이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청와대는 인사 문제와 관련해 윤 당선인 측과 협의는 할 수 있으나, 아직 임기가 남은 문 대통령에게 여전히 최종 결정 권한이 있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날 “분명한 것은 인사는 대통령 임기까지 대통령의 몫”이라고 못박았다.
반면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은 이날 오후 브리핑을 통해 인사권 문제와 관련해 ”당선인의 뜻이 존중되는 것이 상식”이라며 “저희는 차기 대통령이 결정되면 인사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선이 끝나고 나면 가급적 인사를 동결하고, 새로운 정부가 새로운 인사들과 함께 새로운 국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이 그간의 관행이자 순리”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청와대에 따르면 윤 당선인 측은 한은 총재 뿐 아니라 감사원 감사위원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까지 ‘패키지’ 인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에 문 대통령이 한은 총재만 지명한 것이 문제인지, 한은 총재를 윤 당선인 측이 원하는 이로 지명하지 않은 것이 문제인지, 아니면 협의가 충분히 되지 않은 게 문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아울러 윤 당선인 측이 ‘점령군’처럼 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한은 총재 지명에 앞서 충분히 협의했음에도 불구하고 10분전 통보가 불쾌하다면 미리 허락받고 발표했어야 한다는 것인지 황당하다”며 “대통령선거를 전쟁이라 인식하며 전쟁에 승리한 점령군처럼 권리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태도”라고 비판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또 2017년 4월,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 겸 권한대행이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을 임명했다. 대선을 한 달 여 앞둔 상황이었다. 민주당은 임시 관리자 격인 ‘권한대행’의 인사권 행사를 문제 삼았고, 황 총리는 “국정 공백이 있어선 안 된다. 법적 하자가 없다”고 대응했다.
윤 당선인 측과 국민의힘은 청와대가 임기 말 공공기관장과 임원 인사를 단행한 것을 두고 ‘낙하산 알박기 인사’라고 비판했다. 5년 전 민주당이 비판하던 ‘공공기관 인사권’ 문제를 이번에는 국민의힘이 지적한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임기 말 인사권 행사에 대해 지적하기 어려워졌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 일어난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때문이다. 산하 공공기관에 청와대가 원하는 인사를 앉히기 위해 기존 임원에게 사표를 강요한 혐의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이 수사를 받았다. 이 두 사람은 지난 1월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들은 ‘임기 종료 시점’을 알아봤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의 판결은 달랐다.
결국 이 때문에 임기제 자리는 정권이 바뀌어도 쉽사리 바꾸기 어려워졌다. 현재 공기업 10곳 중 8곳은 사장 임기를 절반 이상 남겨 놓고 있는데, 윤 당선인이 취임과 동시에 임명권을 행사할 경우 ‘블랙리스트’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당선인과 국민의힘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는 식이라 황당하다”며 “임기 종료 시점을 알아본 것이 블랙리스트라면 지금 인수위의 행보는 백색 테러나 다름없다”고 당선인 측을 맹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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