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어렸을 때 자주 듣고 썼던 말에 ‘뜬금없다’가 있네. 갑작스럽고 엉뚱하다는 뜻이지. 생뚱맞다와 비슷한 단어이기도 하고. 함께 놀던 친구가 분위기나 주제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뜬금없다’는 말이 절로 나왔지. 하지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는 그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네. ‘뜬금없다’는 말이 내 고향 사람들만 사용하는 사투리인 줄 알았고,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도 그 뜻을 잘 모르는 것 같았거든. 그러다가 ‘뜬금없다’는 단어가 국어사전에도 올라와 있는 표준말이라는 것과 ‘뜬금’이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고 시세의 변동에 따라 달라지는 물건의 값’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살 때 파는 장소나 사람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많이 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뜬금’이 필요하네. 그렇지 않으면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 모두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어. 시장이 형성될 수 없는 거지.

내가 왜 뜬금없이 ‘뜬금없다’는 단어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하나? 지난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 쓴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라는 꽤 수준 높은 말 때문이야. 윤 대통령은 국회에서 읽은 취임사에서 정치가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가장 큰 원인으로 반지성주의를 지목했네.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는 진단은 맞는 말일세.

후보자 시절 꽤 많은 ‘반지성적’인 말과 행동으로 지성 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분이 갑자기 ‘반지성주의’라는 낯선 단어를 쓰고 있으니 뜬금없게 보이지 않는가? ‘1일 1실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식에 어긋나는 말들을 쏟아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일세. 그 중 몇 개만 다시 보겠네. “인문학이란 건 공학이나 자연과학 분야를 공부하며 병행해도 되는 것이며 많은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 “집 없는 사람이 민주당을 찍게 하려고 일부러 악의적으로 집값을 폭등시켰다.” “대형 쇼핑몰에 있는 좋은 물건들, 명품들 이런 것에 도시인들이 관심을 갖게 되면 자기들의 정치 거점 도시에 투쟁 능력, 투쟁 역량이 약화된다고 보는 것 같다.”게다가‘손바닥 왕(王)자’소동, ‘개 사과’ 논란, 기차에서 앞 의자에 구둣발을 올려놓는 추태, SNS에 올린 ‘여성가족부 폐지’일곱자 공약, 가는 곳마다 허공을 갈랐던‘어퍼컷’공격 등 지성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들도 많았네. 그런 분이 갑자기 ‘반지성주의’라는 수준 높은 개념을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니 ‘뜬금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장자》 외편 <추수>는 황하(黃河)의 신 하백(河伯)과 북해(北海)의 신 약(若)의 대화로 시작하네. 홍수로 수량이 엄청나게 불어난 황하를 보고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의 강이라고 기고만장했던 하백, 하지만 동쪽으로 계속 흘러가 만난 북해를 보고 기가 죽어 망양흥탄(望洋興嘆)하지. 망양흥탄은 다른 사람의 위대함을 보고 자기 자신의 능력 부족을 개탄하는 거야. 자신이 세상 제일인 줄 알았는데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만났으니 기가 죽을 수밖에. 그런 하백을 보고 북해약은 말하네. 우물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만 갇혀 사는 개구리와 더불어는 바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고, 여름 한 철밖에 살지 못해 겨울을 모르는 곤충과는 얼음에 관해 말할 수 없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천박한 사람은 지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공간적, 시간적, 학문적으로 편협한 시각을 가진 사람과는 진리를 논할 수 없다는 뜻이야. 다행히 황하의 신 하백은 늦게나마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알았으니 이제 함께 세상 만물의 이치를 논할 수도 있다는 거지.

윤 대통령이 정말로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손상시키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싶으면 먼저 황하의 신 하백처럼 망양흥탄 해야 하네.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국민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이제부터라도 겸손해져야 해. 근거 없는 음모론, 막말과 거짓말, 가짜뉴스, 폭력적인 어퍼컷, 젊은 남성과 여성의 갈라치기 등등 그가 후보 시절에 했던 반지성적인 말과 행동에 대한 진지한 사과도 필요하고. 지금 내 눈에는 윤 대통령이 북해를 보기 전의 황하의 신 하백처럼 보이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만 보려고 하지.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고 성찰해야만 반지성주의적인 우리 정치 풍토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을 걸세.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