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을미년 양띠 해가 밝았지만, 세상이 하 수상하니 덕담 나누기도 어렵군. 희망이라는 말을 쓰는 게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기도 하네. 이런 절망의 시대에 이순에 들어선 자네에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구먼. 아무쪼록 건강하시게나. 자네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네만…  

2년 전 ‘국민행복시대’를 활짝 열겠다고 공언했던 사람이 누군지 자네도 알지? ‘약속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천은 아무나 할 수 없다’면서 ‘약속을 실천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지금 우리가 그분이 약속했던 대로 ‘국민행복시대’에 살고 있는가? 문정희 시인은 <해피>라는 시에서 “그런데 행복이 어디 있지?/ 어린 날 우리 집 마당에서 꼬리 치던 똥개 해피를/ 본 후로 행복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더군. 정말 행복은 어디로 갔을까? 네이버에서 ‘국민행복시대’를 검색했더니, 공공기관 사이트들에서만 ‘국민행복시대’가 넘쳐나고 있더구먼. ‘국민’이 아니라 ‘정부’만 행복해진 건가?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과반수에 가까운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작년에 이순의 나이였네만,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당황스러울 때가 많네. 모든 걸 순리대로 듣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귀가 순해져서 60살을 이순(耳順)이라고 한다는데, 아직도 귀에 거슬리는 것들이 많으니 내가 세상을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한 예를 들면, 나는 왜 비슷한 나이 또래이거나 나보다 더 오래 산 사람들과 세상을 보는 눈이 크게 다른지 모르겠네. 여론조사에서 흔히 ‘60대 이상’으로 총칭되는 분들 대다수는 왜 아직도 많은 선거 공약을 파기한 대통령을 지지할까? 함께 대학을 다녔던 친구들마저 나랑 생각이 크게 다르니 답답하고 씁쓸할 뿐이야. 그러니 나이 드신 분들이 나랑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이유를 내 나름대로 추측해 볼 수밖에.

난 세상이 답답할 땐 고전을 찾네. 《논어》위정편 제15장에 있는 ‘학이불사즉망, 사이불사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공자 말씀이 눈을 사로잡는구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말이네. 여기서 어둡다(罔)는 말은 아무리 많이 배워도 얻음이 없다는 뜻이지. 우리들 주위를 보게나, 아무 생각 없이 종편 같은 곳에서 얻어 들은 지식을 고정불변의 진리로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참이라고 주장하면서 타종교를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근본주의자들도 많네. 이런 사람들에게 자유주의의 기본 가치인 똘레랑스(관용정신)를 기대하는 건 문자 그대로 연목구어(緣木求魚)이지. 그러면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된 보편지식은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만 믿고 행동하면 위험하다는 뜻이야. 이런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무모한 행동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외골수들이네.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자기가 살고 있는 좁은 우물을 지상낙원으로 알고 더 넓은 곳을 보지 못하는 개구리들이지. 

난 우리나라에서 ‘60대 이상’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매우 보수적인 이유를 ‘학위불사’와 ‘사이불사’에서 찾고 싶네. 우리들이 자랄 때 ‘생각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생각한’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태극기 앞에 가슴에 손을 얹고 서서,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고 맹세하라고 하면 응당 그래야만 되는 줄 알고 따랐지. 우리는 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줄줄 외우라고 명령하면 무조건 암송했었네. 우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주체적인 ‘시민’이 아니라 ‘국민’으로 길들여진 거야. 그런 게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국민의식화 기제들이란 걸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지. 그러니 나이 드신 많은 분들은 ‘나’보다는 ‘국가’를 더 중시하는 국가주의를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네. 반공을 자유민주주의의 동의어로 알고 있는 것도 당연하고.

그럼 같은 교육을 받은 나는 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냐고? 내 자랑하는 것 같아서 쑥스럽지만, 난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 ‘생각하면서 배우는’ 노력을 계속했네. 그래서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네. 하늘이 주신 행운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난 지금도 계속 배우는 걸 좋아하네. 작년부터는 공자, 노자, 장자, 맹자, 석가 등 우리 조상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 성현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있지. 서로 배타적이고 적대적이기도 한 그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배운 게 뭔지 아나? 바로 똘레랑스야.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의 생각을 용인하는 관용의 정신.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공부의 목적은 자기 수양이라는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더군. 많이 알면 알수록 생각과 행동이 부드러워지는 게 사실인 것 같네. 그래서 이 땅에서 함께 늙어가는 많은 사람들도 나이 들면 뻣뻣해지는 몸과 마음의 유연성 유지를 위해 공부를 했으면 좋을 것 같네만… 《논어》위공령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 오늘 편지를 마치네. “내 일찍 종일토록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자지 않으며 사색한 적이 있었으나 유익함이 없는지라, 배우기만 못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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