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지난주에는 광양매화축제에 다녀왔네. 섬진강 양변의 산기슭에 활짝 핀 매실나무의 꽃들을 보니 남도는 이미 봄이 한창이더군.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더디게라도 오지만, 우리네 삶에는 아직 봄이 먼 것 같네. 특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하는 빈곤층(working poor)’에게는 꽃향기 가득한 봄이 더 견디기 힘든 계절일지도 모르네. 

하지만 아무리 해찰하기 좋은 봄일지라도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미며” 일어나 더디게라도 온다고 했으니 오늘은 좀 희망적인 이야기나 해보세. 작년부터 신자유주의 체제의 버팀목이었던 국제기구들과 미국 등 선진국들이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횟수가 부쩍 많아졌네.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에게 했던 것처럼, 세계 모든 나라들에게 신자유주의 시장체제를 받아들이도록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했던 국제통화기금이 어떤 기구인지는 알지? 아마 IMF라고 말하면 더 잘 알 걸세. 그 조직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가 작년에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모인 세계 지도자들에게 소득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해서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으니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말을 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사실 난 믿기지 않았네. 세계 경제가 좀 나쁜 것으로만 생각했지.

작년 8월에는 세계 3대 국제신용평가회사 중의 하나인 미국의 스탠더드앤푸어스(Standard & Poor’s)가 소득불평등이 미국의 경제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을 땐 조금 놀랐지. 지난 30여 년 동안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이 국제금융자본의 경찰견 노릇을 한 게 사실 아닌가? 어느 나라든지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에서 벗어날 기색을 보이면 요란하게 짖어 대던 기업이 소득불평등을 언급하다니… 

작년 12월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소득불평등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소득불평등을 경제성장의 최대 걸림돌로 지목하고 나섰네. 소득불평등의 확대가 저소득층의 교육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거야. 그러면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최고 세율 인상, 각종 비과세와 세금 감면 축소 등을 통해 부유층의 세 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정책 권고까지 내놓았네. 점점 더 심각해지는 소득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경제 성장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이지. 상식에 가까운 말인데 OECD가 이야기하니 다른 무게로 다가오더군.

자기규제적이고 자기수정적이며 자기충족적인 시장메카니즘만 믿었던 국제기구들이 갑자기 정부의 적극적인 재분배정책, 재정지출, 노동정책을 주장하고 나서니 내 머리가 아프고 혼란스럽네. 1980년대 대처리즘과 레이건노믹스로 시작된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것도 같네만…
 
미국과 한국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낙수효과(trickle-down)’를 믿고 따르는 분들이네. 위에 물이 차면 넘쳐서 아래로 흘러 내리 듯, 대기업의 이익이 많아지고 부유층의 소득이 높아지면 이들이 투자와 소비를 늘려 경제성장률도 높아지고 중소기업이나 저소득층에게도 돈이 흘러들어 중산층과 가난한 사람들도 잘 살게 된다는 게 낙수효과야. 우리식으로 말하면, 아랫목 따뜻해야 윗목도 따뜻해진다는 뜻이네. 그런데 자네 아궁이에 불 피워 본 적이 있나? 굴뚝이 낮거나 방고래가 막히면 아무리 많은 불을 피워도 아랫목만 뜨겁고 윗목은 차갑네. 낙수효과가 작동하지 않는 경우지. 지금 세계경제가 그런 상황에 있는 건 확실한 것 같네.

2008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경기 침체가 지속되자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 지도자들도 임금 인상을 촉구하고 있네. 2012년 집권한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도요타와 히타치 등의 대기업 총수들을 만나서 읍소도 하고 골프도 치면서, 임금 좀 올려달라고 애걸했다고 하더군. 25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장기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 거지. 그런 노력 덕분인지 몰라도 올해 들어 도요타, 파나소닉, 도시바 등 대기업들이 기본급 인상을 약속했다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지난 1월에 의회에서 행한 국정연설을 통해 부자증세와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나섰네. “소수만 유별나게 성공하는 경제를 받아들일 것이냐, 모든 노력하는 이들의 소득 증대와 기회 확대를 창출하는 경제에 충실할 것이냐”고 물으면서, “1년 내내 일해 받는 임금 1만5000달러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어디 한번 해보시오”라고 의원들을 다그치기까지 했다네. 최저임금을 현재 시간당 7.25달러인 연방 최저임금을 10.10달러로 올리자는 거야. 그러자 미국에서만 50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월마트가 시간당 최저임금을 9.5달러로 인상했으며, 내년에는 10달러로 인상한다는 약속까지 했다네.

그러면 우리나라는? 최경환 부총리가 최근 임금 인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재계의 반응은 신통치 않네. 저물가와 내수 부진으로 경기가 침체하는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라도 임금을 올려서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게 정부의 생각이지만, 재계의 반응은 아직 싸늘하며 반발하는 기미마저 보이네. 경총(한국경영자총협회)은 “임금 인상이 내수 진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대외 경쟁력 상실이 더 우려된다”며 정부의 요구에 부정적이네. 기업의 지불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임금인상은 수출 경쟁력 저하, 투자 위축, 일자리 창출 기반을 저해할 수 있으므로 곤란하다는 거지. 그래서 경총은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요구를 거부하면서 회원사들에게 올해 1.6%의 임금 인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네. 정부의 3.8% 공무원 임금 인상에 대한 반발처럼 보여 여러 모로 씁쓸하구먼. 앞으로 어떻게 결론이 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OECD에서 소득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들 중 하나인 건 사실 아닌가? 미국과 일본은 대통령과 수상이 나서서 임금인상을 독려하거나 애걸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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