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시사위크] 지난 2일 이란 핵 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이제 이목은 평양으로 쏠리고 있다. 잠정적인 합의일 뿐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한 평가도 있지만, 12년 만에 중동지역의 핵 확산에 브레이크가 걸렸기 때문에 다음 수순으로 북한 핵이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동북아의 화약고인 북핵 프로그램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공감대도 미국 등 주요 6개국(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국과 독일을 의미하는 P5+1)간에 조성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핵협상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향후 15년간 핵 물질의 생산중단을 비롯해 원심분리기를 1만9,000개에서 6,104개로 감축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핵 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정기적 사찰 및 감시 허용,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의 단계적인 해제도 핵심 내용이다. 핵 동결과 경제적 보상을 맞바꾸는 빅딜인 셈이다.

그런데 이란 핵 협상 내용은 과거 북한과 미국 사이에 이뤄진 제네바 핵 합의의 틀과 유사한 측면이 적지 않다. 당시 양측은 북한 핵의 동결과 함께 IAEA의 북한 핵시설 감시 재개 대가로 대북 경수로 지원, 50만t 중유 지원 등을 합의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경제제재 해제와 북·미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는 걸 약속했다.

하지만 북한은 핵 합의를 성실히 이행하는 대신 이른바 ‘핵 억제력’ 강화를 위한 시간벌기에 나섰다. 앞으로는 회담테이블에서 핵 프로그램의 포기를 전제로 한 로드맵을 논의하면서 뒤로는 핵 능력 강화를 위한 연구와 핵 실험 준비를 서두른 것이다. 소위 ‘협상을 통한 확산’이란 전술을 구사한 것이었다.

2006년10월 이후 세 차례의 핵실험 감행 과정을 되짚어보면 북한이 핵 포기에 진정성 있게 응했는가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한다는 게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라늄 농축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자 발뺌해놓고는 일정 시간 뒤 돌연 핵 실험과 함께 핵보유국 지위를 요구하고 나선 게 대표적이다.

이란이 국제사회에 대해 핵 포기를 선언하게된 것은 무엇보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 금융거래 등 돈줄을 틀어막는 미국 주도의 오랜 경제제재는 이란을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만들었다. 핵 협상 타결과 경제제재 해제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나선 이란 국민들의 모습에서 오랜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은 국제사회의 기대에 거꾸로 반응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른바 3난(難)으로 불리는 식량난·외화난·에너지난에도 불구하고 핵 능력 고도화에 매달리고 있다. 피폐해진 민생을 외면하고 있는 형국이다.

핵에 대한 북한 당국의 집착은 ‘경제-핵 병진노선’에 고스란히 함축돼있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집권 이듬해인 2013년 3월말 내놓은 이 병진노선은 한마디로 핵 프로그램과 경제개발을 함께 추진하겠다는 의미다. 핵무기 개발로 재래식 무기의 생산과 배치, 운용에 들어가는 군사비가 줄어들게 됐으니 이를 민생에 돌리겠다는 구상도 제시됐다. 2012년 4월 김정은이 첫 연설에서 “다시는 인민들의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했던 내용과도 맥이 닿아있다.

헌법 개정을 통해 ‘핵 보유국’임을 명시한 북한 당국의 핵에 대한 강한 집착은 관영매체의 보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경제·핵 병진노선 발표 2주년을 맞은 지난 3월31일자 노동신문은 경제·핵 병진노선 채택을 '역사적 사변'으로 주장하며 “불패의 병진노선을 튼튼히 틀어쥐고 강성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에 철저히 구현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노동신문은 “지난 2년간은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의 병진노선의 정당성과 생활력이 뚜렷이 확증된 격동적인 나날이었다”며 “병진노선이 안고 있는 진리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해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해외 국가 원수들의 병진노선 포기 권고에 대해서도 북한은 거부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병진노선은 일시적 대응책이 아니라 우리가 항구적으로 틀어쥐고 나가야 할 전략적 노선”(노동신문 2월20일자)이라고 강변한다. 김정은 집권 이후 병진 노선을 강조하면서, 북핵을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수호하고 나아가 세계 평화와 안전을 담보하는 만능의 보검(寶劍)’이라고 주장해온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보면 북한이 이란처럼 핵 포기를 밝히고 국제사회의 요구에 따를 가능성은 적다.

김정은이 집권 초반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공언하고 경제·핵 병진노선까지 거론하며 민생해결을 외쳤지만 성과는 없다. 오히려 그의 경제 분야 리더십에 대한 비판과 실망감이 드러나고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 스스로 경제건설 관련 통치활동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경제개혁의 주도권을 쥐려다 위기를 겪은 화폐개혁 트라우마도 그 중 하나로 꼽힌다.

2009년 11월30일 전격적으로 단행한 화폐개혁은 김정은 후계체제 출범을 겨냥한 승부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 자본세력인 ‘돈주’들의 반발에 사실상 실패했다. 화폐개혁의 실패는 사회적으로는 정책불신과 함께 잠재적 불만을 고조시켰다. 1974년 2월 노동당 5기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에 내정된 김정일이 그해 10월 ‘70일 전투’라는 일종의 생산력 증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 성과를 선전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다.

김정은의 경제·핵 병진노선은 1960년대 할아버지 김일성이 주창한 중공업과 국방 병진노선의 변형이다. 하지만 내부적인 경제건설을 위해 병진노선을 제기했던 김일성 시대와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핵 문제는 국제사회가 우려하고 촘촘한 제재망으로 전면 압박하는 사안이다. 결국 민생은 피폐해지고, 국제무대에서 고립과 비효율은 극한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형틀인 셈이다.

집권 초기 일각에서는 김정은의 서방유학 경험을 들어 그가 서구문물과 개방에 대한 거부감이 적을 것이란 기대가 나왔다. 그렇지만 2,400만 명의 주민이 자신을 ‘인민의 영도자’로 대를 이어 떠받들게 공들이고,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모습에서는 “나에게서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던 김정일의 집권 초를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수령 독재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김정은은 주체이데올로기와 선군정치의 프레임에 갇혀버린 슬픈 운명의 지도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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