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한비자 韓非子》에 많은 우언(寓言)들이 있는데, ‘화숙최난(畫孰最難)’이란 사자성어로 알려진 제나라 왕과 그림을 그리는 사람(화가)의 대화가 <외저설좌상>편에 나오네. 제나라 왕이 “무슨 그림이 가장 그리기 어려운가?”라고 묻자 식객이었던 화가는 “개와 말”이라고 대답했고, 왕은 다시 무슨 그림이 가장 그리기 쉬운가라고 묻자 화가는 “귀신”이라고 말했네. 왕이 그 이유를 묻자, 화가는 개와 말은 사람들이 날마다 보는 것이니 똑같이 그려야 해서 어렵고, 귀신은 형체도 없고 직접 본 사람도 없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그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네. 어떻게 그리든 누가 나서서 귀신이 아니라고 증명할 사람이 없으니 그리기가 가장 쉽다는 거야.

내가 왜 ‘귀신’ 이야기로 편지를 시작하는지 짐작하는가? 근래 우리 사회에 귀신을 그리는 화가 같은 분들이 너무 자주 나타나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있기 때문일세. 20년 전에는 유명 대학 총장 한 분이 마치 대한민국이 주사파들로 인해 곧 무너질 것처럼 떠들더니, 요즘은, 자네도 보고 나도 봤던 영화 <변호인>으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부림사건’ 담당 공안검사였던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구먼. 그분의 막말을 듣고 있으면 나도 혹시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네.

그분이 말하는 ‘공산주의자’의 정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반 국민들의 상식과는 너무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네. 내가 보기에는 개혁적 혹은 적극적(positive) 자유주의자에 불과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가 그의 눈에는 “변형된 공산주의자”로 보이는가 보네. 이명박 정부 이래 점점 보수화되고 있는 사법부에 ‘김일성 장학생’이 있다거나, “국사학자 90%가 좌편향”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뭔지는 나도 궁금하네. 그분은 자기가 “공안 전문가라 일반인이 모를 때” 누가 공산주의자이고 종북인지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재주가 있다고 자랑하지만 나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만 들리네. 혹시 그분이 귀신에 씌어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그분이 귀신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고? 아무튼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기신 분이 국민들 귀가 막히는 말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하네.

내가 언젠가 자유민주주의가 먼저 발달한 서구의 많은 나라들이 체제 비판에 매우 자유롭고, 다양한 가치와 이념, 문화 등이 공존하는 다원화된 사회가 된 게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믿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지? 자유주의자들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타고난 이기심(윤리의 불완전성)과 정보와 사고능력의 부족(인식의 불완전성) 등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그렇게 불완전한 존재들이 모여 사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나? 그게 자유주의자들이 법이나 제도로 권력을 상호 견제하고 통제하는 삼권분립이 필요하고, 비판의 자유와 관용정신도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일세. 고영주 씨도 젊었을 때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읽었다고 하는데 왜 귀신만 그리고 있는지…

아무튼 자신이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나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낙인찍는 사람은 이미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와 정신을 배신한 거네.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소중하면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기본권도 중요하다는 걸 인정해야 진정한 ‘애국세력’이 아닐까? 입만 열면 ‘애국’을 외치는 분들도 자기들과 다른 생각을 한다고 뚜렷한 근거 없이 ‘공산주의자’나 ‘종북’으로 낙인을 찍는 게 대한민국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하네.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도 모든 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종교, 사상, 취향 등을 인정하고 보호해야지. 그래야만 다양한 가치들이 울긋불긋 오색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는 거니까. 대한민국이 북한 왕조보다 더 나은 게 뭔가? 모든 국민들이 왕의 신민이 아니라 자율적인 ‘시민’으로 자기 하고 싶은 것들 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역사교과서든 ‘종북’ 낙인찍기든 이젠 제발 ‘북한 따라 하길’ 멈췄으면 좋겠네만… 우리 사회의 지적 수준이 점점 50년 전으로 퇴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심란한 10월일세.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