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전 시사저널 정치팀 팀장,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실 국장, 전 청와대 정책비서실 국장
[시사위크] 박근혜 대통령의 화법은 마치 레이저가 두꺼운 쇠를 뚫듯이 날카롭고도 강렬하다.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 던진 “진실한 사람을 선택해 달라”는 발언이 나흘째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발언의 파문은 형태를 달리 하면서 내년 4월 총선 때까지 계속될지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년 총선에 깊숙이 개입하여 ‘진실한 사람 vs 거짓된 사람'의 대결구도로 치르겠다는 의도가 현실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그동안의 발언을 되짚어 보면, 발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졌다. “대전은요?” 하는 발언이 선거판세를 뒤집었고, “규제는 암덩어리”라는 발언이 강력한 규제철폐 정책으로 나타났으며, 작년 6월 ‘배신의 정치’ 발언은 유승민 찍어내기로 현실화됐다. 이렇듯 박 대통령의 발언은 꼭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힘이 있고, 신뢰성이 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도 18년 재임 동안 빈말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의 화법은 대국민 담화나 기자회견 때 고개를 푹 숙이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행정적 교시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딸 박근혜 대통령이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발언을 작심하고 따박따박 짚어가는 ‘간결한 단문단답형’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화법은 딱딱하고 권위적이며, 독선적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오늘날 감성시대에 바람직한 화법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중에는 의외로 독한 표현들이 많다. ‘참 나쁜 대통령’ ‘암덩어리’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가 쳐부술 원수’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들을 단두대에 올려 처리해야” 등의 발언과 이번에 문제가 된 ‘혼이 비정상’ 발언 등이 그렇다. 과거 막말 시비가 많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미면 어때?” “대통령 못해먹겠다!”처럼 투박한 말투 때문에 비판을 받긴 했지만, ‘원수’ ‘단두대’처럼 섬뜩한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요란한 대포’라면, 박 대통령의 발언은 ‘조용한 레이저총’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박 대통령의 발언이 왜 이토록 강렬할까? 발언 속에 혼(魂)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매사에 치밀하고 용의주도하다. 말도 행동도 무심코 하지 않는다.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 뒤에 작심하고 쾅 내던지는 스타일이다. 그 말속에는 오랜 삶의 고통과 내공이 담겨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1일 청와대에서 열린 사회보장위원회 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다.” 2013년에 벨기에를 방문했을 때 한 6.25 참전용사가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일화를 2년이 지난 후에야 소개하면서 한 말이다.

박 대통령은 실제로 은혜를 꼭 갚는 스타일이다. 이명박 정부시절 세종시 이전문제 충돌과정에서 자신을 도왔던 이완구 충남지시사와 통진당 해산에 기여했던 황교안 법무장관을 총리로 발탁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원수를 갚는 것도 결코 잊지 않는 스타일이다.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찍어 끌어내렸으며, 내년 4월 총선 때는 ‘유승민과 그의 사람들’을 궤멸시키기 위해 ‘TK 물갈이’를 배후 조종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의 화법은 필법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말투를 보면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듯이, 글쓰기도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1989년 12월1일자 박 대통령의 일기를 보자. “나의 생은 한마디로 투쟁이다. 가장 내가 원치 않는 생의 방식. 그러나, 받아들을 수밖에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시 1990년 1월10일자 일기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옛날에 본 검객 영화가 생각난다. 올바르게 살아나가려는 검객에게 끊임없이, 끊임없이 방해꾼이 따르고 배신과 고통 등이 이어진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그런 고통이나 역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룬다.” 1995년에 펴낸 박근혜 대통령의 저서 <내 마음의 여정>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겨냥한 듯 한 발언이 나오는데, “자기의 권력을 믿고 큰소리치며 거만하게 번득이던 그의 눈이 아직도 기억난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처럼 박 대통령의 말 뿐만 아니라 글에도 ‘투쟁’ ‘방해꾼’ ‘거만’과 같은 강렬하고도 섬뜩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요컨대, 박 대통령의 말과 글속에는 ‘원한 맺힌 검객의 칼날’이 엿보인다. 대통령의 공격적인 발언은 또 다른 공격적인 반응을 자초한다. 바라건대, 박 대통령은 이제 권력의 최정상에 오른 만큼, 좀 더 따듯한 위로와 격려의 화법을 구사하기를 바란다. 대선후보 시절에 보여주었던 여유로운 미소와 썰렁 유머는 어디로 갔는가? 부드럽고 감성적인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꽁꽁 얼어붙은 정치권과 국민들의 마음을 한 순간에 녹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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