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시사위크] 남북 화해와 신뢰 구축이 이뤄지고, 교류·협력이 활성화라는 기대 속에 맞은 2015년이 이제 채 한 달이 남지 않았다. 광복 70주를 계기로 남북관계에 큰 진전이 있지 않을까하는 부푼 꿈을 안고 출발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내세워 신중한 대북접근을 시도했다. 김정은 정권은 이를 ‘대북 강경론’이라며 불만을 토로하며 거친 비방을 쏟아냈다. 결국 북한의 8월초 목함지뢰 도발과 그에 대응한 우리 정부의 대북심리전 방송 재개는 무력충돌이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았다.

고위 당국접촉을 통해 가까스로 접점을 찾았지만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북한은 8.25 합의에서 지뢰도발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당국회담 재개를 통해 남북관계의 진전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대북방송의 스위치를 내리자 태도는 뻣뻣해졌다. 석 달 만에야 후속 실무접촉을 통해 ‘12월 11일 당국회담 재개’에 합의했지만 아쉬운 대목이 적지 않다. ‘서울 또는 평양’에서 회담을 하기로 합의해놓고도 북한은 ‘개성’을 고집해 관철시켰다. 당국회담 대표의 급도 차관급으로 기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의제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현안문제’로 두루뭉술하게 합의함으로써 시작부터 난항이 예상된다.

지난 10월 노동당 창건 70주 행사 때 북한이 핵 실험이나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지 않은 것을 두고 북한이 유화 제스처를 취한 것이란 분석이 많았다. 도발과 대결보다 대화와 타협 쪽으로 정책노선을 돌린 것이란 얘기였다. 금강산에서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치러졌고, 개성 만월대 복원 사업과 남북한 노동자 축구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협력 사업이 재개를 위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도 그 방증으로 여겼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위태로운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북한이 대화와 관계개선을 위한 노선을 선택했다고 확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여전히 핵을 포기 않겠다고 고집하면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또 당장 임박한 것은 아니지만 핵 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위한 준비도 계속 진행 중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차관급 당국회담 날짜까지 합의하고도 돌아서서 곧바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를 감행한 건 북한의 도발본능이 여전히 컨트롤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발사에 실패했지만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현장을 참관했다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위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내년이면 집권 5년차인 김정은이 박근혜 정부와 남북 당국관계를 진전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판단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남북관계 복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고 대외관계를 확장해 경제위기를 해소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8.25 합의 이후 북한이 보여주는 행동은 이러한 진단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밝힌 ‘북남관계의 개선’ 필요성이나 ‘최고당국자 회담’에 대한 용의 표명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이 진정으로 ‘인민생활 향상’이란 자신의 캠페인을 현실로 만들려는 의지가 있는지도 회의적이다.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 연설을 통해서도 ‘인민’을 100차례 가까이 언급하는 등 ‘애민’과 ‘민생 챙기기’를 부각시켰다지만, 현실은 평양이나 노동당 핵심계층을 위한 시설투자와 과시성 건설드라이브에 치중하고 있다.

무엇보다 경제·핵 병진노선이 북한 인민의 생활을 향상시켜줄 수 있다는 미몽에서 북한이 벗어나기 전에는 김정은 체제가 대남인식의 전환이나 개혁·개방 같은 전향적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경제·핵 병진 노선은 그 자체의 모순보다는 이로 인한 환경적 요인, 즉 핵 프로그램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을 김정은 체제가 넘어서기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북한에게 파국적 선택일 수밖에 없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 뿐 아니라 시진핑 체제의 중국 영도그룹이 최근 보여준 북핵에 대한 강한 반감이나 불신은 북핵과 김정은 체제의 병진이나 양립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 제안을 이행해야 하는 정부는 난감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지구상에서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북한이란 체제를 상대로 ‘신뢰 프로세스’를 밟아나가야 한다는 점에서다. 이대로 간다면 올 한해의 대북정책 성적표는 결코 좋은 점수를 얻기 힘들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구상을 소기의 결실로 연결시키려면 통일준비에서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다.

첫째는 거대담론보다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어젠다의 제시다. 그동안의 통일논의나 준비는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개괄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다보니 정작 남북통일 과정에서 맞닥트릴 여러 문제에 대한 연구나 해법은 미흡했다. 이젠 통일을 위해서는 정말 꼼꼼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할 국민 공감형 로드맵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서로 다른 통신체계와 기기를 쓰는 남북한 핸드폰은 어떻게 통하게 할 수 있고, 컴퓨터·핸드폰 자판은 통합을 어찌할지를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둘째, 구호나 말보다는 행동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야 한다. 중장기적인 구상이나 대책 없이 일회성 이벤트나 캠페인에 머무는 통일준비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손에 잡히는 통일준비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셋째, 남북관계나 대북문제를 둘러싼 남남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의 마련이 요구된다. 남북 간 화해와 교류협력이 지속가능한 상황으로 이어지려면 우리 사회 내부에서의 화합과 공감대 형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우리 주도의 통일노력에 대해 수세적으로 방어하면서, 대남 선전선동을 통해 남남갈등을 꾀하는 상황에서 이런 노력은 더욱 절실하다.

광복 70년, 북단 70년인 올해는 통일 대한민국을 향한 우리 국민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분출한 한해였다. 진정한 광복은 분단의 종식에 있다는 취지에서 통일의 중요성에 공감대를 이룬 것이다. 아쉬움이 적지 않지만 얼마 남지 않은 2015년을 잘 마무리한다면 내년 통일 노력에 탄력을 붙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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