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나이가 들면 그리운 것들이 많아지나 봐. 버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떠나보내기 어려운 것들도 많고. 우리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도 그런 아쉬움과 그리움의 대상 중 하나인 것 같네. 지금은 어렸을 때 보았던 마을의 모습이 대부분 사라져버렸지만, 삶이 고달프거나 외로울 때 가고 싶은 곳이 고향땅이거든. 설이 다가오니 다시 고향 생각이 간절하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잊히지 않는 게 어렸을 때 살았던 고향의 모습이네.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것처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인 고향은 나에게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리운 대상들 중 하나야. 아마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요즘 대다수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들이 명절이면 고향을 찾는 의미를 잘 알지 못할 거야. 일종의 귀소본능(歸巢本能)이며, 수구초심(首丘初心)이겠지?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향하는 것처럼 나이가 들어도 ‘고향’이란 말이 지닌 매력은 줄어들지 않는 것 같네. 설도 가까우니 오늘은 고향 이야기나 하세. 

난 어디에서든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산들을 구경하기 힘든 넓은 들판 한 가운데 있던 제법 큰 마을이 떠오른다네. 흙만 있던 마당과 고샅길, 마을을 둘러싼 넓은 논과 밭, 동네 앞을 흐르던 실개울과 제법 물이 많아 동무들과 물놀이하며 놀았던 냇가들, 많은 연못들, 동네 앞에 곧게 뻗은 신작로, 그리고 동네 들판 서쪽과 북쪽 끝 제방 너머에 있던 금모래밭과 큰 강물이 생각나지. 그 모든 것들이 다 우리 어렸을 땐 또래친구들의 놀이터였다네. 비록 배는 좀 고팠지만 마음껏 놀아도 되는 복을 받고 태어난 마지막 세대가 우리 또래야. 되돌아보면 놀이터 하나 변변한 게 없던 도시에서 자랐던 또래들에 비해 이른바 ‘촌놈들’이 훨씬 더 행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

더구나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겨울은 거의 모든 주민들이 밥만 먹고 노는 휴식 기간이었네.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저녁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 우리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등잔불을 켜놓고 공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 부모들도 자식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고.

그러니 겨울 내내 실컷 놀 수밖에. 낮에는 양지바른 곳에 모여 딱지나 구슬을 치고 공놀이를 했었지. 눈이 오면 동무들과 눈싸움을 하거나 형들 따라 다니면서 꿩과 산토기를 몰았지. 연못이나 개울의 물이 얼면 스케이트를 만들어 탔고, 밤이면 동무들 집에 모여 밤늦게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시시덕거렸지. 그때는 날마다 무슨 말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나누었는지… 그때 함께했던 말들은 생각나지 않지만 함께 있으면 그냥 좋았었던 것 같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어머님들이 주신 물고구마와 동치미로 배를 채웠지. 나이가 좀 들어서는 막걸리나 소주도 마시기 시작했고.

겨울에 가장 재미있는 놀이 중 하나는 불놀이였어. 그땐 배고프고 추운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불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지. 꽤 높고 넓은 제방을 태우면서 놀 때가 제일 재미있었네. 그렇게 놀다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기러기 떼들이 줄을 지어 날고 있었지. 인근에 산이 없어서 유난히 넓었던 하늘에서 바람의 리듬에 맞춰 추던 기러기들의 군무는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풍경이야. 

서정주 시인은 자신을 키운 게 8할이 바람이라고 말했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내 모습의 8할 정도는 청소년기를 보냈던 고향의 자연 환경이 만든 것 같네. 아마 지금 내가 우리 땅에서 살고 있는 야생화들이 좋아 찾아다니는 것도 어렸을 때 농촌에서 살았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도시가 아닌 촌(村)에서 태어난 걸 행운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지. 어렸을 때부터 자연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이나,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외경심도 갖지 못했을 거야. 정신과 마음이 삭막한 도시인으로 자연의 신비나 경이로움을 모른 채 살고 있을지도 몰라. 미국의 초절주의 철학자였던 랄프 왈도 에머슨은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온 세상을 여행하더라도 자기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없다면 찾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지. 내가 지금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고향 덕분이라고 생각하네.

‘고향’이란 말을 들을 때면 이순을 넘긴 지금도 그리운 게 몇 가지 있네. 첫째는 부모님이고, 둘째는 어렸을 때 함께 뛰놀던 동무들이고, 셋째는 동무들과 함께 놀던 강변 금모래밭이고, 넷째는 밤하늘에서 쏟아지던 별들이야. 그립다는 건 지금은 만나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걸 알지? 부모님은 오래 전에 하늘나라로 돌아가셨고, 동무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서 만나기 어렵고, 강변의 금모래밭은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고, 전기가 들어온 후로는 별들도 모습을 감춰버렸어. 그러니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땅에 가도 이제는 낯설기만 해. 게다가 어렸을 땐 엄청나게 넓게 보였던 들판은 높은 시멘트 교각 위에 얹힌 도로로 두 토막이 났으며, 동무들과 뜀박질하며 놀던 들에는 비닐하우스들만 가득하네. 그래서 댐 물속에 고향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나도 근대화로 인해 철저하게 파괴된 고향의 옛 모습이 보고 싶을 때가 많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별을 매우 좋아했네. 특히 동무들과 밤늦게까지 놀다가 돌아올 때 동네 골목과 들판에 쏟아지던 별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해. 다른 동무들은 달이 뜨지 않은 음력 그믐께를 무서워했지만 난 그때쯤에 별들이 제일 많아서 더 좋아했지. 골목길을 걸으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많은 별똥별을 봤어. 그땐 ‘어린왕자’가 그 별들 중 하나에서 장미와 함께 살고 있다는 걸 몰랐지. 그런데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들을 보고 있으면 왜 마음이 아프고 슬펐는지…

예전 동네에는 귀신 나온다는 우물과 칫간도 많았지만 나는 그 별똥별들을 눈과 마음으로 보면서 걷는 밤이 매우 행복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고향에 가도 그런 별들 보기가 쉽지 않네. 전기가 들어오면서 어둠을 밀어내버리니 별님들이 다 떠나버린 거지.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상국 시인이 <별에게로 가는 길>에서 노래했듯이, 아직도 별들은 밤마다 떠올라 “기우는 집들의 굴뚝과/ 속삭이는 개울을 지나와/ 아직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모르네.  그 별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고향에 다녀와야겠네. 설 잘 쇠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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