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시사위크] 국제사회의 대북제제망이 더욱 촘촘하게 짜이면서 평양 정권을 압박하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응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 3월초 내놓은 대북결의 2270호는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고 광범위한 제재리스트를 담고 있다는 게 우리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의 평가다.

특히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최고 권력층을 겨냥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유엔 결의에 따라 각 국가들이 속속 내놓고 있는 독자적인 제재방안은 평양 특권층의 식탁까지도 변화시킬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지난달 말 스위스가 내놓은 독자제재 리스트가 대표적이다. 스위스 연방경제교육연구부가 공시한 시행령에 포함된 대북 금수 품목은 모두 25개에 이른다. 여기에는 북한 최고 권력층이 즐겨온 것으로 파악된 와인은 물론 술과 담배 등 기호품이 올랐다. 또 고급식재료인 캐비어(철갑상어 알)와 송로버섯, 초콜릿, 고급빵, 과자 등이 포함됐다. 모두가 김정은 위원장이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진 먹거리와 기호품이다.

김정은은 10대 시절 스위스 베른에서 조기 유학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어릴 적 접한 서방의 문화와 식품 등에 매력을 느껴 아직까지도 스위스 제품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접했던 스위스 에멘탈 치즈를 아직까지도 즐겨먹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집권 이후 평양에 현대식 마트나 카페를 짓도록 한 뒤 스위스로부터 수입한 제품을 판매토록 한 것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은 체제선전과 특권층 환심 사기 차원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여러 위락시설을 건립했다. 여름철 평양 주민들에게 가장 인기를 끈다는 문수물놀이장은 ‘평양판 알파마레(Alpamare)’로 불리는 워터파크다. 김정은이 유학시절 종종 찾았던 취리히의 대규모 물놀이공원 알파마레를 본뜬 시설이다. 대동강변 문수지구에 위치한 이곳을 김정은은 공사기간 중 7차례나 직접 찾을 만큼 공을 들였다.

특권층 챙기기의 정점으로 불리는 마식령스키장도 스위스 유학시절 추억을 떠올려 지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말도 힘들어 쉬어 넘는다’는 해발 768m의 강원도 마식령(馬息嶺)에 불과 8개월 만에 스키장과 호텔을 짓느라 군인 건설자와 돌격대가 말 그대로 속도전을 벌여야 했다고 한다. 지난 2013년 12월 31일 열린 준공식에선 김정은이 직접 스키를 탄 것으로 우리 정보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스위스가 독자제재 리스트에 스키와 골프·승마·당구·볼링·해양스포츠 관련 제품과 장비의 대북 반출을 금지한 것도 김정은의 이런 행보를 정조준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앞서 유엔도 대북제재 2270호에서 고급시계와 함께 수상레저 장비, 스노모빌(눈과 얼음 위에서 작동하는 차량) 등을 리스트에 올린 바 있다.

외교가에서는 국제사회의 이런 움직임이 유학시절 스위스 명품 등에 집착하기 시작한 김정은을 압박하는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일각에서는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 정권이 김정은의 식탁에 오를 고급와인이나 식자재의 경우 제3국을 통해 우회 수입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김정은과 특권층의 삶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중국까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대북압박 의지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 북한의 입장에선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란 주장도 만만치 않다. 제재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날 올 가을을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도 적지 않을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김정은은 지난 2012년 4월 공개연설에서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북한 국방비는 2013년 전체 예산 중 16%(실제로는 은닉 예산 포함 30% 선)에서 지난해엔 15.9%로 0.1%포인트 낮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재래식 무기 등 군비 지출이 핵 개발로 인해 확 줄어들었으니 인민생활로 돌리겠다던 이른바 ‘경제-핵 병진노선’이 허구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다.

특권층만을 위한 체제운영을 하다 보니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이 ‘1% 공화국’이 돼 버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2400만명의 인구 중 극히 일부만이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 정보 당국은 북한 핵심층 6만명과 가족(한 가구당 4인 기준)을 포함하는 24만명이 북한에서 특권층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대북제재가 몰고 올 파장과 북한 특권층의 삶의 질 변화여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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