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시사위크] 영국주재 북한 대사관 태영호 공사의 탈북·망명이 평양 핵심부를 뒤흔들고 있다. 그가 가족과 함께 한국행을 택한데 대한 충격파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태영호 공사가 최고의 엘리트 외교관 중 한명인데다, 김정은 체제에 대한 서방의 여론 공세를 막는 소방수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다.

북한 외교관 망명설이 나온 초기에 영국 현지 언론이나 외교가에서 ‘태영호’를 즉각 지목한 것도 그가 외신 등에 잘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실제 유튜브 영상에는 북한의 열악한 인권실태나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한 비판 여론에 맞서거나 해명하는 태영호 공사의 강연 및 인터뷰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문제는 태영호 공사의 탈북·망명을 계기로 북한의 해외 공관과 무역기관 종사자들의 이탈이 줄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등지에서도 외화벌이 간부나 공관원의 탈북 망명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자녀의 미래나 교육을 위해 과감히 탈북을 결단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 당국이 뒤늦게 해외에 동반하고 있는 자녀 등을 평양으로 소환하는 조치에 나섰지만 근본적인 대응책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북한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엘리트 세력의 이탈은 북한 정권으로선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해외 주재원이나 유학생 등 엘리트 그룹의 탈북이나 망명은 급증세를 보였다. 1997년 2월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태는 김정일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올 정도로 충격을 줬다. 하지만 이후 탈북은 굶주림이나 처벌을 위한 일반 주민의 이탈이 대부분이었다. 국내 입국한 3만명 가까운 탈북자의 대부분이 북한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던 주민이었다.
 
그런데 김정은 집권 5년차에 접어든 올해 들어 엘리트 계층의 탈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김정은 통치에 실망감을 맛본 북한 권력의 핵심층이 먼저 짐을 싸고 있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해외 근무 등으로 외부사정에 밝은 이 계층은 김정은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을 누구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 또 영어에 능통하고 서구문물에 익숙해 서방 또는 한국행을 택하더라도 큰 부담이 없다.

노동당과 군부의 고위 간부를 마구잡이로 공개처형하는 김정은의 즉흥적 리더십에 실망한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특히 이른바 ‘빨치산 혈통’으로 불리는 북한 체제의 핵심 부류마저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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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북한 권력의 중추를 구성해온 원로세력은 어린 김정은의 집권에 대해 미덥지 않은 반응을 보여 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6세의 막내아들을 전대미문의 3대 세습방식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로 낙점한 데 따른 것이다.

김정은은 2010년 9월 노동당 3차 대표자회에서 후계자로 추대됐다. 주민들 사이에서 ‘청년 대장’으로 불리던 김정은은 하루아침에 대장 계급을 부여받으며 노동당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란 첫 직책을 맡았다. 이듬해 12월 김정일이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김정은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노동당 제1비서, 군 최고사령관 등 권좌를 거머쥐었다.

예상보다 안정적으로 북한체제를 이끌고 있다는 분석이 일부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올 들어 핵과 미사일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우려도 나온다. 좌충우돌식의 모험주의적 리더십이 결국 파국을 맞을 것이란 전망이 등장한 것이다. 경륜이 짧은 김정은이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지 못한 채 미국, 중국 등을 상대로 무모한 도박을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에 우리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김정은의 성향과 통치 스타일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권력을 거머쥔 첫해인 2012년에 김정은은 ‘미숙한 리더십’이란 우려를 불식시키는데 치중하는 듯 했다. 20대에 집권한 청년 지도자라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인민 친화적’인 리더십을 통해 주민의 지지를 얻으려는 행보도 드러냈다.

하지만 고모부인 장성택 처형을 시작으로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펼침으로써 평양 권력의 핵심부는 꽁꽁 얼어붙었다. 북한 엘리트 계층 사이에서 불만과 반감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이를 계기로 했다는 게 우리 당국의 설명이다.

엘리트 탈북망명 사태에 대해 김정은은 “도주나 행방불명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요인을 사전에 적극 제거하고 실적이 부진한 단위는 즉각 철수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게 우리 관계당국의 파악 내용이다. 이런 조치에 대해 해외에 근무 중이거나 파견이 예정된 외교관이나 사업체 종사자들은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특권층의 전유물이자 빡빡한 평양 생활의 숨통으로 여겨지던 외국 체류 생활 기회가 줄어들거나 사라지게 됐다는 점에서다.

특히 일부에서는 평양 로열패밀리로 불리는 김정은 일가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북한 내에서는 이미 김정은과 그 친인척을 지칭해 “백두혈통도 어느 집안에 뒤지지 않는 탈북자 가족”이란 말이 나돈다고 한다. 사실 김정은의 이모인 고용숙(생모 고영희의 동생)은 남편과 함께 199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현재 미국 한인타운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여자로 알려진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도 딸 부부와 함께 서방국가로 탈북 망명했다. 탈북자 단속에 누구보다 열을 올리고 있는 김정은의 스타일을 구기게 만들 만한 상황이다.

태영호 공사의 탈북 망명은 북한 엘리트들이 김정은과 로열패밀리에 대해 보낸 경고음이다.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이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고 나올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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