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위크> 윤길주 편집인.
당신은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는가. 이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온 나라에 ‘수저계급론’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어 자신의 ‘위치’를 한번쯤 가늠해봤을 거란 얘기다.

태어나자 마자 부모의 직업이나 경제력으로 수저의 등급이 결정된다는 수저계급론.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수저로 만든 ‘인간 등급표’다. 육질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한우도 아니고,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이 땅에 자조 섞인 수저계급론이 횡행하는 건 당연하다. 누구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도 작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조차 힘들다. 휴학을 몇 번씩 하며 문을 두드려도 직장 문은 열리지 않는다.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공시족’이 우글거린다. 공시 3수, 4수는 예사다. 이들은 이번 추석에 고향에도 못가고 쪽방에서 축 쳐진 어깨로 눈물에 젖은 빵을 씹을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들에게 코웃음일 뿐이다. 신분상승의 사다리는 소수의 특권자들에게나 허용된 지 오래다. 흙수저들은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에서 금수저들이 자본과 권력을 독점한다고 믿고 있다. 보통의 젊은이가 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면 ‘절망국가’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나라를 이끈다는 사람들은 흙수저의 아픔을 보듬기는커녕 분통터지게 하는 말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며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노력하라고 촉구했다.

죽기 살기로 알바를 뛰어도 등록금 융자금조차 감당 못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대통령의 말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누가 헬조선을 만들었는가. 권력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긴 전·현 집권층, 반칙과 특혜로 남의 자리를 빼앗은 자들, 권력의 개가 돼 떡고물을 챙긴 자들이 헬조선의 주역 아니던가.

대통령은 좌절하는 젊은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뒤틀린 ‘게임의 롤’을 바로잡겠다고 했어야 했다. 일자리를 늘려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겠다고 하는 게 우선이었다. 청년 10명 중 3.4명이 실업자(현대경제연구원)인 현실에서 대통령의 ‘질책’은 뜬금없게 들릴 수 밖에 없다.

최근 임명된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흙수저 타령’으로 진짜 흙수저를 농락했다. 그는 명문 경북고와 경북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고시(행정고시 21회)를 패스했다. 온갖 의혹에도 불구, 장관에 임명된 직후 그는 모교인 경북대 동문회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청문회 과정에서 온갖 모함, 음해, 정치적 공격이 있었다. 지방학교를 나온 흙수저라고 무시한 게 분명하다.” ‘황제전세’ ‘특혜대출’ 의혹에 휩싸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경북대를 ‘흙수저 대학’이라고 한 것을 보고 동문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그의 인식이다. 지방 명문대를 나와 고시에 합격하고 장관까지 된 사람이 흙수저 타령을 한다는 게 가당치않다. 설사 정치적으로 곤궁해서 그렇다 해도 너무 나갔다. 이참에 김 장관은 흙수저라고 자조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지 깊이 살펴봤으면 한다.

유행병처럼 떠도는 ‘헬조선’ '흙수저‘란 신조어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계급구조는 고착화 돼 있고,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어서다. 이를 깨기 위해서는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대오각성이 요구된다. 권력도 돈도 다른 사람의 희생이 있었기에 쥐어진 것이다. 희생자에게 나눠주진 못할망정 그들의 몫까지 빼앗으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지금 흙수저들의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어 폭발지경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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