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시사위크] 언론에 나온 우병우 수석 교체설 보도를 보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권력무상이라는 말도 떠올렸을 것이고, 조선일보도 떠올렸을 것이고, 잊혀져가던 감찰관이라는 단어도 생각났을 수 있고, 나아가 이번 선거사범 기획수사도 생각났을 것이다. 처가의 땅을 떠올린 사람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조간신문에 비수처럼 박힌 활자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내놓은 반응은 “최순실이 세긴 세네”라는 자조 섞인 한탄이었을 것이다.

‘최순실’은 현재 권력이 보여주고 있는 비상식, 비정상의 상징이다. 이화여대를 발칵 뒤집어놓은 딸 정유라, 미르재단 사건과 함께 떠오른 인물 차은택, 나아가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등장했다는 무당설에 이르기까지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빨래터에서 소문을 퍼나르던 시절의 전설처럼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권력의 비정상성이 정계ㆍ관계ㆍ재계를 넘어 상아탑까지 마수를 뻗쳤다는 것은 ‘최순실 게이트’의 파장이 전방위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문광부 직원에 대한 사퇴압력’ ‘대학 부정입학 의혹’ 등에 이르면서 드라마는 정점에 이른다. 공적이어야 할 권력이 대놓고 사유화되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분노한다. 더 큰 문제는 이 분노를 외면한 채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실질 권력 순위를 따지며 권력을 희화화하기 시작한다.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공방이 벌어지는 기이한 상황이 계속된다.

‘송민순 필화사건’은 이런 가운데 터져 나왔다. 새누리당의 아이디어는 야권의 선두 대선주자인 문재인의 과거 행적을 문제 삼아 ‘안보프레임’으로 이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NLL의 향수를 떠올렸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물론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을 찬성할 것인지, 기권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해야 할 일이다. 또 당시 비서실장이던 문재인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북한에 사전동의를 구했는지 여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냥 정치인이 아니라 차기 유력 대선후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거기에 대해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다. 문재인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지금이라면 북한인권선언에 찬성할 것”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새누리당의 의도다. 그것이 정말 안보를 위한 것인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모략적인 프레임을 거는 것인지는 정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특히 지금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은 지난 주 26%(한국갤럽 기준)로 최저점을 찍었다. 30대 40대가 11%, 서울이 18%다. 이 같은 수치는 국민들의 정서가 한마디로 ‘분노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지지율이 하락한 가장 큰 이유는 최순실 게이트로 상징되는 비정상 권력 때문이다. 나아가 이 여론의 기저에는 삼성의 갤럭시7 판매중단 사태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제추락에 대한 위기감이 반영돼 있다. 권력 스캔들에 경제무능이 더해진 것이다.

새누리당 지지율도 비슷한 수준인 28%로 최저점을 찍었는데 이는 국감을 앞둔 당대표의 단식을 비롯해 국민을 중심에 두지 않는 ‘표류하는 리더십’이 자리하고 있다. 즉 송민순발 안보프레임으로 최순실로 상징되는 권력의 총체적 난국을 덮기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바둑의 위기십결에는 ‘봉위수기(逢危須棄)’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강한 곳에서는 마땅히 부담이 될 만한 돌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한없이 약해졌을 때에 모두를 살리기는 어렵다. 돌을 버려야 새롭게 설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 있다. 즉 우병우ㆍ최순실ㆍ차은택 등 정부에 부담을 주는 인물들을 과감히 정리해야 정국 주도권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새누리당은 정권재창출이라는 엄중한 대선국면을 앞두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승자가 패자를 죽이는 ‘총’이 아니라 승자가 여당이 되고 패자가 야당이 되는 ‘투표’를 택한 상생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현직 대통령이 인기가 없을 때 정당은 대통령과 합의하든 그렇지 않든 ‘거리두기 전략’을 쓰게 마련이다. 그것은 정권재창출이라는 큰 대의 아래서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이다. 그런데 최근 새누리당은 총선 패배 이후에도 ‘청와대 여의도 출장소’라는 국민적 오명을 극복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지지율 20%대 정권에 대한 충성경쟁을 계속하는 한 정권재창출의 길도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누리당에 전략가가 있었다면 지금 타이밍에 프레임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겠지만, 안보프레임을 통한 국면전환을 꾀하더라도 보다 정교한 전략과 메시지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냥 되는대로 난타전을 벌이고 나아가 ‘내통’ ‘결재’ 같은 과격한 언어선택으로 스스로의 명분을 위축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야권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대선후보에게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국민의 수준을 모멸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며 우리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민주주의는 섬멸이 아니라 경쟁의 제도다. 네거티브를 할 수 있지만 거기엔 일정한 룰과 선이 있다. 축구나 복싱 경기에서 상대 선수의 귀를 물어뜯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선을 넘으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우병우, 최순실, 미르재단 같은 문제들을 국민적 눈높이에서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북핵위기 돌파를 위한 국민적 통합을 강조했다면 그것으로 경제위기를 넘어설 수는 없어도 지금보다는 한층 나은 안보프레임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과 여당이 내 편과 네 편을 노골적으로 가르는 순간, 네 편은 적이 되고 내 편 안에도 새로운 적이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다.

새누리당은 지금의 상황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충성만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 분노한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돌아보라. 얕은 정치적 논리로 이 위기국면이 돌파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뼈아프게 깨달아야 한다.

새로운 선거에선 새로운 경쟁이 필요하다. 지난 10년 동안 보수세력은 자신을 끊임없이 혁신하며 정권재창출에 성공했다. 지금은 당내 혁신이 실종됐다. 누군가는 혁신의 불꽃을 살려내야 국민들은 그 새로운 경쟁을 새로운 기대를 갖고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새로운 리더십도 움틀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국민들이 묻고 있는 핵심 질문을 겸허히 들어야 한다.

“대한민국 권력은 지금 누구에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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