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누가 일곱 개의 성문이 있는 테베를 세웠는가?/ 책에서 그대는 왕들의 이름을 발견했다네./ 왕들이 바위 덩어리를 끌어 날랐는가?/ 그리고 몇 번이고 파괴된 바빌론,/ 누가 바빌론을 몇 번이고 일으켜 세웠는가?/ ...... 청년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네./ 그는 혼자였는가?/ 시저는 갈리아 사람들을 무찔렀다네./ 그의 옆에는 요리사가 없었는가?/ ...... 쪽을 넘길 때마다 등장하는 승리./ 누가 승리자들의 연회를 위해 요리를 만들었는가?/ 10년마다 등장하는 위인./ 누가 그들을 위해 대가를 치렀는가?// 너무나 많은 이야기./ 그만큼 많은 의문.

베르롤트 브레히트의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이라는 시야. 요즘 이른바 대선후보라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을 보니 저 시가 생각나더군. 엄동설한에 광장에 나와 벌벌 떨며 ‘박근혜 퇴진’, ‘박근혜 구속’을 외친 사람들이 누군데 벌써 대다수 민중의 뜻과는 다른 말을 하는 정치인들이 하나 둘 등장하는 걸 보면, 이번 촛불혁명이 과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지 걱정이 많네. 1987년처럼 다시 권력욕에 찌든 몇몇 대권주자들의 기회주의적인 처신 때문에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집어든 책이 크리스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일세. 이 책은 왕조나 군주들의 이름을 나열하거나 ‘위인’들의 초능력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역사책은 아니야. 하먼에 의하면, 왕조들의 목록이나 족보를 배우는 것은 역사를 사소한 오락거리로 만들어 과거와 현재 어느 쪽의 이해에도 도움이 안 된다네.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특정사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역사’ 역시 ‘사건들의 상호연관성’을 빠뜨리기 쉽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더 큰 힘’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있고. 실제로 18세기 중엽부터 서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자본주의의 전 세계적인 확장과 노동운동의 등장, 자유민주주의 확대 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거지.

하먼에게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낳은 사건들의 연속”인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의 우리가 됐는지에 관한 이야기”야. 그래서 지난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한 열쇠”가 되는 거지.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도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그의 역사관 때문이야. 지금 우리가 왜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세상의 꿈도 꿀 수 있다는 거지.

하먼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두 가지 편견들을 질타하고 있네. 첫째, 지금껏 존재한 사회들과 인류 역사의 중요한 특징들이 어떤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소산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본성은 역사발전의 산물이지 그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이지. 둘째, 인간 사회가 과거에는 변했을지 몰라도 더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비판해.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체제 경쟁은 없다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 종말론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사회학자 앤토니 기든스의 패배주의가 여기에 속하네. 하먼은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역사의 주된 특징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어.

이 책에서 하먼은 자연을 이용해 먹고사는 인간의 능력을 점점 커졌지만 소수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다수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 조직 형태들이 어떻게 잇달아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했네. 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엄청난 규모의 부를 산출하면서도 계급지배구조와 억압, 폭력이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세계로 보고 있네. “21세기의 세계는 탐욕,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엄청난 불평등, 인종차별적 · 국수주의적 편견, 야만스러운 관습, 끔찍한 전쟁이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언제나 이 모양이었고 앞으로도 달라질리 없다고 믿기 쉽다. 실제로 수많은 작가, 철학자, 정치인, 사회학자, 기자, 심리학자가 그렇게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은 위계구조, 굴종, 탐욕, 잔혹성을 인간의 ‘자연스런’ 속성으로 그린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것이 동물계 자체의 특징이라고 본다.”

하지만 하먼은 결코 절망하지 않고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말하네. 무슨 근거로? 역사는 “수많은 남녀들의 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거니까. 지난 수 천 년 동안 민중들은 “때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때로는 세상을 바꾸려고 몸부림쳤으며, 그 과정에서 종종 실패하고 가끔은 성공하면서 자신들과 동료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더 나은 삶을 만들고자 애써왔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거지.

난 이번 촛불혁명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억압받고 배제되어왔던 노동자, 여성, 노인, 성 소수자, 이주민 등에게 역사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는 각성과 희망의 촛불이 되길 바라고 있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를 읽길 권하는 거고. 물론 지금 돌아가고 있는 형국을 보면 이번에도 일부 기회주의적인 정치인들의 권력욕 때문에 죽 쑤어 개 주는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결말이 나지 않게 하는 것 또한 촛불의 힘이겠지. 자네나 나나 공식적인 ‘노인’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다가는 꿈을 잃지 않도록 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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