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 도발로 탐색전 나선 북한 정권의 딜레마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시사위크] 트럼프에 맞서 김정은이 빼내든 첫 도발카드는 탄도미사일 쏘아 올리기였다. 북한은 12일 오전 평북 구성인근 방현기지 부근에서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지 23일만의 일이다.

우선 미국의 본토를 위협할 수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이 아닌 한 두 단계 아래의 발사체를 골라 도발 수위를 조절하려한 분위기가 읽혀진다. 발사 시점도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트럼프 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 직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은 우선순위가 매우 매우 높다(very very high priority)”고 공언한 직후다. 두 정상이 미 플로리다주 팜비치에서 골프를 즐긴 직후라 이례적인 긴급 공동성명까지 나왔다. 김정은으로서는 일단 ‘북한’이란 존재를 트럼프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치열한 기세싸움은 이제부터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명운을 건 대결은 불가피해 보인다. 관영 TV를 통해 중계된 올 신년사에서 김정은은 “ICBM 시험발사 준비사업이 마감단계”라고 공언했다. 그러자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에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며 가능성을 일축했다. 북한의 도발에 강력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자제를 요구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눌린 때문인지 김정은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향배와 메시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관망행보를 보였다. 트럼프와 그 보좌진의 대북 강경발언에도 애써 냉정을 지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북한 외무성 미주국장 최선희는 지난해 11월 북·미간 접촉 당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윤곽이 드러나기 전에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겠다”는 언급을 내놓았다. 제임스 메티스 미 국방장관의 한국 방문에 대해 제대로 된 비난 논평 한줄 제시하지 않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번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김정은의 ‘트럼프 떠보기’ 차원이라 볼 수 있다. 취임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지켜보다 잠정적인 1차 평가를 내린 뒤 워싱턴을 향해 불만표출 차원의 도발카드를 던진 것이란 얘기다.

사실 김정은의 입장에서 보면 분위기가 좋지 않다. 워싱턴의 조야에서는 1994년 영변 핵시설 폭격 추진 이후 잠들어있던 대북 선제타격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8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게 제출한 인준 청문 서면답변에서 “(대북) 군사적 위협에서부터 외교 문호 개방까지 모든 옵션을 테이블 위에 올려둘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7일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은 미 육군협회가 워싱턴DC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 “북한을 타격할 공격역량을 반드시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는 북한의 예상을 빗나간 측면이 있다. 지난해 미 대선 과정에서 김정은 정권은 트럼프 측에 섰다. 대선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지난 6월 북한은 선전매체를 동원해 “미국 국민이 선택해야 할 후보는 우둔한 힐러리가 아닌 현명한 트럼프 후보”라는 주장도 펼쳤다. 트럼프가 현명한 정치인이고 선견지명이 있는 대통령 후보감이란 요지였다. 돌출 발언과 괴팍스런 행동으로 ‘막말 후보’나 ‘괴짜’로 여겨지던 트럼프에 대한 북한 당국의 강한 기대가 깔려있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처럼 북한 당국의 기대가 부풀어 오르게 만든 건 트럼프의 돌출적 언행이었다. 평양 당국의 구미를 가장 당기게 한 건 주한미군과 관련한 언급이다. 트럼프는 선거 기간 내내 주한미군의 주둔 비용을 한국이 전액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지난해 5월 CNN과의 인터뷰에서 주한미군 주둔 분담금 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트럼프는 “100%는 왜 안 되나”라고 반문했다. 이에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 카드까지 빼낼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직후 트럼프는 달랐다. 그는 “미국은 한국과 100% 함께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은과의 정상회담 가능성까지 열어놓은 것으로 해석된 발언도 화제가 됐다. 지난해 6월 조지아주 애틀란타 유세 당시 트럼프는 “김정은이 미국에 온다면 만날 것”이라며 정상회담 가능성까지 열어놓았다. “회의 탁자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더 나은 핵 협상을 할 것”이란 말도 했다. ‘전략적 인내’를 기치로 하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무시와 압박 정책에 시달려온 김정은으로서는 솔깃한 언급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당선 이후에는 분위기가 대북 강경기조 쪽으로 확 달라졌다.

사실 트럼프의 과거 발언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의 비판적 대북인식이 드러난다. 지난 2000년 개혁당 후보 출마 때 펴낸 책 <우리에게 걸맞는 미국(The America We Deserve)>에서 트럼프는 북한의 원자로를 폭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또 “핵 전쟁을 원치 않지만 협상이 실패한다면 북한이 (미국에) 실질적 위협을 주기 전에 무법자들을 겨냥한 정밀 타격을 하는 걸 지지한다”고 말했다. 김정은을 “미치광이 같다”고 비난하며 “빨리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언급한 일도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맞대결은 다음 달 본격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항공모함 칸빈슨호를 비롯한 전략자산이 한반도에 전개될 키리졸브 한미합동군사연습을 계기로 북한이 실제 ICBM 도발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다.

북한은 지난해 4월 ‘ICBM 대출력 엔진’의 연소시험 장면을 공개했다. 또 외무성 대변인은 1월 8일 “ICBM은 우리의 최고수뇌부가 결심하는 임의의 시각, 임의의 장소에서 발사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원도 원산 갈마공항 지역에서 최근 북한이 ICBM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최선희 외무성 미주국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향방을 주시하겠다면서도 “만일 한미합동군사훈련이 개최될 경우 북한의 대응은 '매우 거칠 것'(very tough)”이라고 말해 도발을 예고했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직접 신년사에서 ICBM을 언급한 마당에 머뭇거리는 인상을 주다가는 ‘트럼프의 기세에 눌린 것’이란 인상을 북한 군부와 노동당 엘리트들에게 줄 수 있다. 주민들이 김정은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자칫 집권 6년차를 맞아 통치기반을 다지려던 시도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거침없는 언행과 통치스타일, 좌충우돌하는 듯한 성향 등이 닮은꼴이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할 경우 햄버거를 먹으며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한반도와 국제정세는 이런 방향보다는 나쁜 시나리오 쪽으로 흘러갈 공산이 커 보인다. 냉철한 사업가인 트럼프가 잠재적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김정은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다.

트럼프의 엘로카드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또 경기장의 룰을 어기는 모양새를 노출했다. 트럼프의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대북 분위기는 심상치 않아 보인다. 김정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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