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도겸 칼럼니스트
안중근 의사는 고려 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 의사는 1884년 박영효 등에 의해 도일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906년부터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안 의사는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였다. 곧이어 연해주로 망명하여 1908년 봄 이범윤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실질적인 중심이 되었다. 제1 2차 국내진공작전의 일환으로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생포한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며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보내게 되어 있다’는 만국공법에 따랐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신소장품 특별전 <동포에게 고함 : 안중근 옥중 유묵>을 오는 23일(목)부터 5월 28일(일)까지 개최한다.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의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1909년 1월 의병 재기를 도모하면서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하얼빈 역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구구하게 일본인들에게 구걸하기보다 안 의사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공소도 포기한 채 사형을 받아들였다. 그의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할 정도로 의연했던 안 의사는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찾아온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에 차디찬 중국 뤼순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던 교육가, 문무(文武)를 겸비한 선비이자 의병장, 하늘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신앙인으로서 안중근 의사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신소장품 특별전 <동포에게 고함 : 안중근 옥중 유묵>을 오는 23일(목)부터 5월 28일(일)까지 개최한다.

▲ ‘지사인인 살신성인(좌)’,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우)’라는 글은 교육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던 교육가로서 안중근 의사의 철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언행 자체가 실천이 된 ‘지행합일’의 모습을 유묵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 : 황금 백만 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라는 글은 교육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던 교육가로서 안중근 의사의 철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 :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라는 글은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는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안중근 의사의 애국심과 위엄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새롭게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 만해 한용운 거사와 함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또 한 분의 소중한 안중근 의사를 꼭 만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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