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시사위크] 인생은 ‘선택’이란 요소로 이어지는 일련의 여정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선택의 고비마다에는 갈등과 고민이 적지 않다. 커피 한잔을 시켜먹더라도 아메리카노냐 카페라떼냐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지금 같은 계절에는 뜨거운 커피가 좋을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선택해야 할지 선택장애에 시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선택에는 불가피하게 후회가 따르기도 한다. 요즘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자신의 선택에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바로 미국 대선과 관련해 트럼프의 당선을 원했던 것 때문이다.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미국의 대북정책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뽑혔고 대북접근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실제상황은 김정은의 기대와 너무 달랐다. 북한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을 무시하고 이른바 ‘전략적 인내’로 일관했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트럼프 취임 이후 북한은 더욱 혹독한 상황을 맞고 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초강경 압박과 제재 움직임은 평양 정권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다. 중국의 손까지 비틀며 대북 공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는 트럼프의 드라이브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당혹해하는 표정이다.

지난 15일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출생 105주년 군사퍼레이드는 이런 상황에 대한 북한식 무력시위였다. 그렇지만 퍼레이드에 나선 북한의 전차군단이 고장으로 연기를 뿜으며 대열을 이탈했고, 이튿날 쏘아올린 미사일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런 모습으로는 김정은이 공언했던 군사강국도, 핵·경제 병진노선도 이룰 수 없는 꿈이란 걸 노출시켜버렸다. 해외언론까지 불러들여 제대로 스타일을 구긴 것이다.

화가 난 북한 당국은 트럼프에 대한 화풀이에 한창이다. 신홍철 북한 외무성 부상은 17일 중동 알자지라 방송과 평양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이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는 어떠한 징후라도 감지되면 우리군은 미군 기지가 한반도, 일본뿐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그들의 침략에 가차 없이 대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도널드 트럼프는 세상을 열린 눈으로 봐야 한다”는 말도 했다. “미국에서 힘을 쥔 사업가들(트럼프 정권)이 전 정부처럼 우리를 군사적으로 또는 제재로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소용없는 일이 될 것”이란 대목에서는 트럼프에 대한 불만이 드러난다.

지난 18일에는 북한의 관영 선전매체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업가 이력을 거론하면서 대북정책을 전환하는 게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현실적 선택이라는 주장을 폈다. 북한의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논평에서 “지금이야말로 타산이 밝기로 유명하다는 기업가 출신의 트럼프 행정부가 현실을 똑바로 보고 운명적인 선택을 하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민주조선은 지난달 28일 논평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업가 출신 당국자들을 겨냥해 “밭은(얕은) 정치 감각을 가지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분수없이 놀아대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북한은 미국 대선 기간에 트럼프 캠프 쪽에 상당한 기대를 거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만큼 실망감이 크다는 얘기다. 대선이 한창이던 지난해 6월에는 “미국 국민이 선택해야 할 후보는 우둔한 힐러리가 아닌 현명한 트럼프 후보”라는 주장을 선전매체를 통해 펼쳤다. 트럼프가 현명한 정치인이고 선견지명이 있는 대통령 후보감이란 주장이었다. 돌출 발언과 괴팍스런 행동으로 ‘막말 후보’나 ‘괴짜’로 여겨지던 트럼프에 대한 북한 당국의 강한 기대가 깔려있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런 분위기는 대선결과에 대한 북한 당국의 첫 반응에서도 나타났다 노동신문은 트럼프의 당선 이튿날 내놓은 지난해 11월 10일자 논평에서 “미국이 바라는 조선(북한)의 핵 포기는 흘러간 옛 시대의 망상”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 확보를 추가해보겠다는 구상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북한이 트럼프에 기대를 걸었던 건 그의 유세 발언 때문이다. 지난해 5월 CNN과의 인터뷰에서 주한미군 주둔 분담금 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트럼프는 “100%는 왜 안 돼냐”고 반문했다.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 카드까지 빼낼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김정은과의 정상회담까지 화제에 오르자 북한은 후끈 달아올랐다. 지난해 6월 조지아주 애틀란타 유세 당시 트럼프는 “김정은이 미국에 온다면 만날 것”이라며 “회의 탁자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더 나은 핵 협상을 할 것”이란 말도 했다.

하지만 당선자 트럼프는 태도를 확 바꿨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직후 트럼프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미국은 한국과 100% 함께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표를 의식한 트럼프의 유세발언과 그의 실제 철학이나 대북관의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지난 2000년 개혁당 후보 출마 때 펴낸 책 <우리에게 걸맞는 미국(The America We Deserve)>에서 북한의 원자로를 폭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또 “핵 전쟁을 원치 않지만 협상이 실패한다면 북한이 (미국에) 실질적 위협을 주기 전에 무법자들을 겨냥한 정밀 타격을 하는 걸 지지한다”고 말했다.

사실 김정은은 전지전능의 ‘수령’이란 존재로 북한 체제 내에서는 우상화되고 있다. 어떤 정책 결정과정에서 무오류의 선택을 하는 것으로 선전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32살의 경륜이 일천한 지도자일 뿐이다. 3대 세습이란 과정을 거쳐 권력을 물려받았을 뿐 어떤 절차적 정당성이나 권위는 찾을 수 없다. 물론 북한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테지만 말이다.

요즘 김정은은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북 선제타격이 국제사회에서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고, 한반도 주변에는 미국의 최정예 첨단 전력이 전개돼있다. 후견국 중국마저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를 일이다. 자신이 선택하고 기대했던 트럼프의 대북 강공 드라이브에 김정은은 땅을 치고 있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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