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지난 17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았다. 신선했던 기자회견만큼 괜찮은 100일이었다. 비상식으로 탈선했던 열차를 다시 상식의 궤도에 올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역사는 현실 정치권력의 비위에 맞게 조작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희생했던 분들의 그 정신을 기리는 것이기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가로막았던 정권은 민주주의의 과정을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10년 동안 정권은 '민주주의의 정원'을 무참히 유린했다. 하지만 그 정원에는 다시 풀도 자라고 꽃도 피기 시작했다. 5.18 기념식장에서 아버지를 추모하던 유가족의 눈물이 새움을 틔웠고, 나아가 세월호 유가족의 청와대 방문도 상식의 복원을 상징했다.

국정교과서를 폐지하고 최저임금을 큰 폭으로 올리는 등 오바마 스타일의 ‘시행령 정치’가 만개했다. 몇몇 인사 잡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한반도 전쟁위기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80% 가까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잘한 것은 광복절 기념사에서 ‘전쟁 불가’ 방침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큼의 실효성을 갖는지 여부보다 김정은과 트럼프에게 평화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 것 자체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전쟁이 모든 것을 잃는 게임이라면 이것을 막는 것이야말로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통령의 강한 의지는 국민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시행령 정치’는 즉각적 행동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데는 턱없이 미흡하다. 강고한 기득권 카르텔은 시행령으로 결코 깨지지 않는다. 이른바 이 나라의 적폐를 없애기 위해서는 법제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20대 국회는 암담하다. 검찰개혁, 재벌개혁을 비롯한 촛불 시민이 요구한 개혁 과제는 과반에도 이르지 못하는 여당의 독주와 민의를 대변하지 않는 야당들의 구태와 맞물려 표류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개혁의 대상인 기득권 세력은 시간 끌기 작전을 쓸 것이고 실제로 ‘5년 단임제의 물리적 한계’는 지연 작전의 유혹을 더 크게 만든다.

특히 자유한국당 내의 탄핵 반대세력은 20대 국회를 식물국회로 만들기 위한 음모를 노골화하고 있다. 기득권 세력은 한반도를 둘러싼 긴박한 상황을 개혁 무산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 들 것이다.

5년 단임제 하에서 개혁은 그야말로 시간 싸움일 수밖에 없다. 여당인 민주당의 정치적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통령도 야당과의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개혁을 위한 현실적인 행동도 매우 중요하다. 효율성을 근거로 청와대가 여의도를 무시하는 시그널을 자주 보내서는 결코 안 된다. 효율성의 늪을 빠져나와 효과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오바마가 그랬던 것처럼 대통령이 야당의 초선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 좇는 꽉 막힌 지도부들만 만나지 말고 국가의 미래와 시민의 고단한 삶을 걱정하는 의원들을 만나 설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위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상호 의존적이며 협력과 적응이라는 과정을 통하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없다. 꽉 막힌 도로에서 앞으로 전진할 유일한 방법은 양보를 통한 협력뿐이다. 제로섬 게임은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즉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살아 숨쉬는 나라를 만드는 일은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제로섬이 아니라 모두가 승자가 되는 포지티브섬이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법안들을 통과시키긴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지금의 정당들이 시민을 대의하지 않고 자기자신만을 대의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물며 3분의2 동의가 필요한 개헌은 더욱 그럴 것이다.

변화를 위한 궁극적인 해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강조했듯이, 시민의 각성된 힘에서 나온다. 시민의식의 성장 없이 해결될 문제는 거의 없다. 사람들은 사익에 따라 움직인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통념은 사익과 이기심을 동일시했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을 장려했다. 시장과 국가 역시 그것을 장려해 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지금 극단적 이기심의 제도화와 이념화가 공멸의 길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기 시작했다. 촛불혁명의 동력은 사적 영역의 울타리를 깨고 나와 ‘공적 영역으로의 모험’을 감행한 시민들로부터 나왔다. 내 주변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고 공적인 이익이 최대의 사익임을 알아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익에 대한 관점의 코피르니쿠스적 전환은 매우 중요하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말이다. 미국 시민대학의 설립자이고 <민주주의의 정원>의 공동 저자인 에릭 리우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트럼프 당선을 “단기적 이기심이 장기적 관점의 시민의식을 대체할 때 벌어지는 결과”라고 했다. 나아가 "독단적인 정책 결정자들이 대중들을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즉 제로섬과 공포를 바탕으로 한 결핍적 사고가 국내외 정책을 이끌어 갈 때 발생하는 결과”라고도 했다.

촛불 혁명은 끝났는가.

최근에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광장의 혁명이 직장이나 가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푸념도 들린다. 촛불시위 과정에서 진주의 한 여고생이 “박근혜만 구속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됩니까”라고 절규했던 것은, 나아가 “우리 안의 박근혜, 우리 곁의 최순실은 어떻게 할 겁니까”라고 아픈 질문을 던졌던 것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그들’에게만 돌리지 말고 우리 스스로도 돌아봐야 한다는 경고였다. 아주 높은 시민의식의 발로다. 거기가 시작점이다.

이런 상상은 불편한가. 살충제 계란을 만든 그들도 촛불시위에 참여했을지 모른다. 광장에 참여했던 연인 가운데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 어디선가 공동체에 심각한 피해를 주면서까지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광장에 있었을지 모른다.

공동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라는 관점의 전환이야말로 새로운 시민운동의 출발점이다. 지난 18일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공동행동’ 시위가 열렸다.

대선 후보 대부분이 공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의제는 국정개혁 100대 과제에 제대로 포함되지 않았다. 유예 조항이 잔뜩 달린 개혁은 안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5년 동안 광화문역 지하도에서 농성을 벌여온 장애인의 핵심 요구는 뒤로 밀려났다.

장애인 의제는 선거 때만 반짝하고 사라지기 일쑤다.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 폐지, 나아가 장애인수용시설 폐지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라는 시민의식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다. 물론 이것 때문에 문재인 정부를 필요 이상으로 비판할 생각은 없다.

정부뿐 아니라 우리도 장애인들을 외면하거나 방치해 왔다는 자각이 중요하다. 나아가 장애인 스스로의 이야기가 많아져야 한다. 촛불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촛불혁명은 시민단체, 정당, 혹은 거대 담론을 즐기는 좌우 이념 속에 깃들지 않고 우리의 삶과 공동체,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광장의 주인은 시민들이었고, 광장의 메시지는 시민들의 스피치에서 절정을 이뤘다. 시민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 장애인들의 이야기, 성소수자들의 이야기,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

이야기가 촛불이고 이야기가 혁명이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모여 바람이 되고 파도가 된다. 변화가 시작된다. 누구의 이익도 대변하지 못하는 정당들을 압박하는 것도, 자칫 기득권 세력에게 포위되어 초심을 잃어갈지도 모르는 정부를 개혁의 길로 완강하게 이끄는 것도 바로 시민들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주제는 단 하나, 공동체의 이익이 자신의 이익이기도 하다는 관점의 대전환이다.

“행동의 전염은 가차 없다.”

에릭 리우의 말처럼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와 행동을 지금 바로 우리가 서 있는 그 곳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선한 행동이 많아지지 않으면 나쁜 행동이 그 자리를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