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선 연임이 확정된 메르켈 총리. 표정이 밝지 못하다. <뉴시스/AP>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25일(현지시각) 종료된 독일 총선의 승리자는 4선 연임을 확정지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아니었다. 기독교민주연합(CDU)/기독교사회당(CSU)과 사회민주당(SPD)의 지지율이 부진한 가운데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1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제3정당으로 발돋움했다. 외신들은 메르켈의 4선만큼이나 독일 극우파의 약진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 메르켈 총리의 상처투성이 승리

BBC의 베를린 특파원 제니 힐은 “메르켈에게 이번 총선의 결과는 처참한 것이다”고 평했다. 이번 총선에서 기독교민주연합과 기독교사회당이 기록한 33%의 득표율은 양당이 연립한 1949년 이후 가장 낮은 지지율이다. 마틴 슐츠가 이끄는 사회민주당 또한 득표율 20%라는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두 거대정당의 초라한 성적표는 양당이 맞잡은 손 또한 갈라놓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겐 입맛이 쓴 날이다”고 선거결과를 표현한 사민당 슐츠 총재는 메르켈과의 대연정이 끝났음을 공식 선언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슐츠 총재는 메르켈 총리가 선거 과정에서 정치적 의제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으며, 이것이 ‘독일을 위한 대안’의 침투를 도왔다고 주장했다.

의석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여당이 야당과 협력해 국정운영을 도모하는 ‘연정’은 다당제 유럽국가에서 흔한 일이다. 제2당인 사민당과의 연정이 사실상 불가능해짐에 따라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자메이카 연정’이다. 자메이카 국기를 구성하는 노란색·검은색·초록색을 기독교민주연합과 독일 자유민주당(FDP), 녹색당의 상징색에 빗댄 ‘자메이카 연정’은 세 당 모두 ‘독일을 위한 대안’을 반대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비중 있게 거론되고 있다. 다만 에너지정책 등 3당의 입장이 명확하게 다른 부분도 존재해 ‘자메이카 연정’의 길도 쉽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 존재감 과시한 극우정당… 독일사회 균열 예고

BBC의 폴 커비는 선거결과가 확정된 25일(현지시각) “독일이 변화의 기로에 섰다”고 보도했다. 난민과 이민자 문제를 ‘반 메르켈’의 기치로 내건 극우파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 때문이다. 독일로 밀려들어온 이민자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믿으며, 독일국민의 사회복지부담을 가중시켰다는 점 때문에 우익세력의 비난을 받아왔다.

독일 언론사 ‘타게스샤우’의 설문조사 결과는 AfD가 득세한 이유를 잘 드러낸다. AfD에 투표한 사람들의 99%는 난민과 이민자의 유입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독일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음을 AfD가 잘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AfD를 정부정책에 대한 자신의 반대를 대변해줄 유일한 정당이라고 생각한 투표자도 85%에 달했다. 또한 AfD가 극우성향을 띄고 있음을 알고서 투표한 사람의 비중이 55%에 달한다는 사실은 ‘이슬람교도는 독일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AfD의 기조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았음을 나타낸다.

메르켈 총리는 “(AfD를 뽑은 사람들의)우려·걱정·염려를 귀담아 듣겠다”고 공식입장을 표명했지만 총선의 파급력은 보다 직설적이다. CNN은 투표결과 발표 후 독일 각지에서 AfD에 대한 반대시위가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외무장관 지그문트 가브리엘은 AfD를 두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나치주의자들이 독일의회에 발을 디뎠다”고 논평했으며, 독일유태인중앙협의회도 극우정당의 행보에 강력한 우려를 표했다. ‘독일을 위한 대안’의 공동대표 중 한 명인 알렉산더 가울란트는 “우리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군인들이 이뤄낸 성과를 자랑스러워할 권리가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반 이민자·반 이슬람을 표방하고 국경안보를 중요가치로 내건 ‘독일을 위한 대안’은 자연스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총선에서 극우파 정당이 패배하면서 한 풀 꺾였던 유럽의 우익정서는 독일에서 다시 불씨를 틔웠다. 가장 민주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독일 의회에 진출한 극우정당의 행보는 유럽사회에 부는 바람을 담아낼 풍향계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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