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할 계획인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중앙은행 총재. <뉴시스/신화>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현재 국제금융계의 가장 큰 이슈는 다름 아닌 통화정책의 향방이다.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는 한편 유럽중앙은행도 완만한 출구전략을 발표했다. 두 중앙은행은 이미 국채매입을 통해 불려온 보유자산을 점진적으로 축소할 계획을 발표했다. 1,4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와 아직 불안한 민간소비 등 위험요인이 산재한 한국도 전 세계적 금리인상기조에 발맞출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일본은 이 분야의 이단아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수차례 대외발언을 통해 통화정책을 정상화할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올해 들어 수출‧투자가 개선됐지만 통화정책방향을 변경할 만큼 경기개선세가 뚜렷하지는 않다는 시각이다. 일본중앙은행은 지난 10월 기준금리를 23개월째 -0.1%로 유지하겠다고 결정했다.

◇ 일본을 배회하는 디플레의 유령

“지난 15년간 쌓여온 ‘디플레이션 친화적 사고방식’을 해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일본중앙은행 구로다 총재의 말은 일본경제에 드리운 그늘을 잘 보여준다.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일본의 긴 경기침체는 이제 ‘잃어버린 10년’을 넘어 ‘잃어버린 20년’이 되고 있다.

낮은 물가상승률이 대표적이다. 일본은 저물가에 고통 받는 유일한 국가는 아니지만, 가장 대표적인 국가임에는 틀림없다. 주요국의 중앙은행들은 통화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물가상승률을 가장 중요한 지표로 거론하고 있으며, 한국 또한 물가상승률 2% 달성을 목표로 잡고 경기부양책을 펴는 중이다. 미국과 한국의 근원물가상승률은 지난 10월 각각 1.77%와 1.6%를 기록(전년 동기 대비)하며 어느 정도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반면 일본중앙은행이 9월 발표한 일본의 근원물가상승률은 1년 전에 비해 단 0.7% 상승하는데 그쳤다.

임금상승률도 문제다. 한국은행은 19일 발표한 조사보고서에서 “일본경제의 고용여건은 크게 개선됐으나, 구조적 문제들이 임금상승을 제약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의 올해 2분기 노동소득분배율은 59.2%로 지난 26년 동안 가장 낮았으며, 1~8월 실질임금상승률은 -0.2%를 기록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비정규직 비중을 줄이는 등 노동소득을 높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가시적인 효과는 내지 못하고 있다.

◇ 구로다 총재와 양적완화정책, 나란히 ‘5년 더’ 외칠까

많은 중앙은행장들이 내년 초 교체될 전망이지만,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중앙은행 총재는 연임이 유력하다. <그래픽=시사위크>

일본 경제계를 지탱하는 것은 완화적 통화정책에 대한 믿음이다. 아베 총리는 집권 초부터 대규모의 엔화를 시장에 쏟아 부으며 유동성 공급과 민간소비 회생을 노렸다. 일본중앙은행에 따르면 지난 2013년 1월 131조9,000억엔이었던 본원통화 공급량은 17년 7월 465조1,000억엔까지 증가했으며, 2012년 말 GDP의 30% 수준이었던 보유자산은 올해 9월엔 95%에 달했다. 함께 양적완화정책을 폈던 유럽중앙은행이 39%,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23% 수준인 것과 비교하면 일본이 어느 정도로 통화 공급에 열을 올렸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늘어난 통화량은 화폐가치를 떨어트린다. 지난 2012년 7월 1일 77.95엔이었던 엔/달러 환율은 아베 총리의 양적완화정책과 함께 치솟아 2015년 동월 동일엔 119.88엔을 기록했다. 3년 사이 엔화 가치가 35% 떨어진 셈이다. 이는 일본의 수출기업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물가상승률을 제고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아직 경기가 탄력을 받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현 상황에서 일본이 다시 엔화가치를 높이려 나설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이유다.

2013년 3월부터 일본중앙은행의 수장을 맡아 ‘아베노믹스’를 진두지휘했던 구로다 총재의 임기도 내년 4월이면 끝난다. 구로다 총재는 자신의 거취와 관련된 어떤 정치적 발언도 내놓지 않았지만, 다수의 전문가들은 구로다 총재의 연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다. 블룸버그가 지난 8월 일본경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구로다 총재가 연임할 가능성은 68점이었으며,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 나카소 히로시 부총재가 차기 일본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될 가능성은 그 절반인 34점으로 매겨졌다. 일본중앙은행 총재의 연임이 지난 1964년 이후 전례가 없던 일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아베 총리와 일본 재무성은 구로다 총재에게 한결같은 신뢰를 보내고 있다. 양적완화 기간 중 각종 경제실적과 고용‧실업 등의 지표가 양호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민당 연립내각이 선거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며 정권을 장악한 배경이기도 하다. 일본의 경기 동향지수는 58개월 연속 ‘경기 확대’를 가리키고 있으며, 블룸버그는 “설령 구로다 총재가 은퇴하더라도 매파가 총재직을 이어받을 확률은 낮다”고 내다봤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