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6일 열린 삼성전자 서초 사옥 농성장 앞에서 열린 ‘고 황유미 10주기 삼성전자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 문화제’. <반올림>

[시사위크=조나리 기자] 기존 ‘삼성직업병’ 산재 인정 문제는 영업비밀과의 싸움이었다. 직업병 피해자들은 산재신청을 하기 위해 자신의 업무 환경이 영업비밀인지 아닌지를 다퉈야 했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을 산재로 인정하는 판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에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법원을 통해 산재를 인정받은 삼성직업병 피해자들의 절반 이상이 올해 승소 판결을 받았다.

지난 8월에는 사업주의 협조 거부나 행정청의 부실 조사 등은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오기도 했다. 사법부가 잇따라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시함에 따라 향후 공단 측의 변화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법원서 산재 인정받은 삼성직업병 12건... 7건이 올해 판결

“반도체 산업에서 백혈병이나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무엇이지 규명하는 일은 몇 년이 소요될지 모른다. 그 가운데 백혈병 환자와 가족들은 수천 만 원의 치료비는 물론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의 질병이 업무상 질환이 아님을 증명할 수 없는 한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2008년 10월7일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2008년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하 반올림)’가 삼성반도체 백혈병 첫 집단 산재신청을 한 해다. 당시 결성된 대책위원회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직업병 피해자들의 신속한 산재인정을 촉구하며 이 같이 밝혔다.

반올림 등에 따르면 공단 측은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의 산재신청을 기각할 때마다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조사 과정도 문제가 많았다. 삼성 측이 영업비밀이라고 하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법원 또한 공단 측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직업병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법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의료사고의 경우 피해자의 입증책임이 완화된 것과 달리 직업병은 여전히 성역처럼 다뤄졌던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2008년부터 삼성직업병 피해자들이 산재를 신청해 법원에서 인정받은 사례는 12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중 7건이 올해 인정받았다.

구체적으로 ▲김미선(2월10일 1심 승소, 7월25일 2심 승소) ▲이소정(5월26일 2심 승소) ▲고(故) 이은주(7월7일 2심 승소) ▲김경순(8월10일 1심 승소) ▲이희진(8월29일 대법원 승소) ▲고(故) 이윤정(11월14일 대법원 승소) ▲고(故) 손경주(11월17일 1심 승소) 등이다.

특히 대법원은 이희진 씨 사건에서 “직업병의 경우 의학적 연구결과가 충분치 않은 이유로 인과관계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며 “특정 질환 발병율이 높은 점, 사업주의 협조 거부나 행정청의 조사 지연 등은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또한 “작업 환경상 여러 유해요소가 존재할 경우 노출허용 기준 이하의 저농도라 할지라도 해당 요소들이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삼성직업병 관련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여는’ 박다혜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대법원을 비롯한 법원들의 최근 판단은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이 위법하는 것을 확인한 것”이라며 “충분한 조사를 하지 않았고, 이것은 근로자의 책임이 없는 사유기 때문에 그로 인한 입증 불가능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향후에도 법원을 비롯해 특히 공단 측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며 “더이상 피해자들이 소송까지 가지 않도록 기존에 산재신청 불승인 사건들을 전수조사해서 승인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10월 31일 오전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열린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 집단 산재신청 기자회견’ 모습. <반올림>

◇ 근로복지공단, 이례적으로 1심 패소 후 항소 포기

“최종 산재 인정이 돼 정말 기쁩니다. 당연한 것을 너무 길고 힘들게 도달하게 됐습니다. 6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결과가 정직원, 협력업체의 문제가 아닌 삼성에서 열심히 일한 모든 동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 삼성반도체 근무자 이소정(가명) 씨

이소정 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 노동자로, 희귀질환인 다발성경화증을 앓고 있다. 1심에서 패소했지만 올해 5월 2심에서 승소했다. 이후 공단 측의 상고 포기로 산재보험의 보호를 받게 됐다. 산재신청 후 6년 만, 병을 얻은 후 12년만이다.

보통 공단 측은 2심까지 패소할 경우 산재신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최근 1심에서 패소한 후 공단 측이 항소를 포기해 산재로 확정된 사례도 있다. 바로 삼성사외하청 노동자로 유방암 진단을 받은 김경순 씨 사례다. 김씨는 지난 8월 1심에서 직업병 피해를 인정받았다.

이에 지난 11월 17일 1심에서 승소한 손경주 씨에 대한 공단 측의 항소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백혈병을 진단받은 손씨는 삼성반도체 공장 협력업체 노동자로, 오퍼레이터나 엔지니어가 아닌 관리자의 직업병이 인정된 첫 사례이기도 하다.

반올림 활동가 이종란 노무사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최근 대법원을 비롯해 전향적인 판결들이 나오고 있지만 공단 측도 같은 추세라고 보기엔 아직 섣부르다”면서도 “그래도 김경순 씨 사례처럼 공단이 1심 패소 후 인정한 사례도 있기 때문에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더이상 공단 측은 과거와 똑같은 이유로 불승인을 남발하고 항소, 상고 등으로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과거의 구태를 중단해야 한다”면서 “그것이 국가기관이 해야 할 일이고 공적보험으로서의 산재보상보험제도의 목적과 기능”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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