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케어러, ‘NO’케어러④] ‘성장할 권리’, 되찾고 싶은 청년의 꿈

2024-05-31     연미선 기자

 

오직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병든 부모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생계를 책임지는 청춘들이 있다.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기에도 바쁜 나이에 ‘영케어러(Young Carer)’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인생의 내공이 쌓인 어른이 감당하기에도 벅차다. 영케어러가 더 이상 가족이란 족쇄에 묶이지 않을 수 있도록, ‘노(NO)케어러’를 외치면 사회가 손을 내밀어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도록. ‘영케어러’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시사위크>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법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참고로, 기사는 인터뷰와 취재 등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구성했으며, 취재원인 영케어러 보호를 위해 가명 및 일러스트를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나를 위한 미래를 꿈꾸고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아동‧청소년기와 청년 시기에 응당 누려야 할 권리다. 그러나 가족돌봄청년에게는 이러한 기회가 당연하지 않다. / 그래픽=이주희 기자

시사위크=연미선·이영실·이민지·이주희 기자  막연하게 그리는 미래부터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자 하는지까지, 어렸을 적 꾸는 꿈들이 있다. 원하는 미래를 스케치한 후에는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한다. 이는 아동‧청소년기와 청년 시기에 응당 누려야 할 권리다. 그러나 이것이 당연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 

◇ 어렸을 적 나의 꿈은

수호(27) 씨와 수아(16) 남매에게 ‘미래’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막막함뿐이다. 수호 씨는 재작년 5월에 제대하고 돌아와서 대학으로 복학하지 못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다. 

누군가가 수호에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지금 전공하고 있는 전기공학을 살려 전기기사 자격증을 따고 싶다고 답한다. 어렸을 적부터 하고 싶었던 분야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당장 엄마가 거동하기가 불편하고 동생이 아프니까,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수아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수아의 어렸을 적 꿈은 웹툰 작가였다. 롤모델인 웹툰 작가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구석에 버려둔 꿈이다. 관련된 공부를 할 여력이 없는 상황인 데다가, 어느 순간 찾아온 우울증으로 그림에서 손을 놔버렸기 때문이다. 중학교 검정고시를 치고 한때는 특수목적고등학교를 지망했던 수아는 ‘엄마 간병은 네가 해야겠다’라는 아빠의 말에 학업도 진로도 포기했다.

가족돌봄청년을 다루는 연구보고서들은 이들이 학업을 중단하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빈곤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보고한다.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투자가 불가능한 상황은 당장 생계비 마련을 위한 취약한 일자리 선택으로 이어진다. 이는 결국 생애 전반의 생활 취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한국아동권리학회 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은주 동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동‧청소년기에 가족돌봄이 시작된 경우, 또래와 다른 가정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우울감, 부모의 역할 부재에 따른 불안감 등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말했다. / 그래픽=이주희 기자 

한국아동권리학회 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은주 동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와 관련해서 가족돌봄청소년과 청년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특히 의무 교육이 포함된 아동‧청소년기에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로 이어지지 않도록 세밀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청년기에 가족돌봄이 시작된 경우, (돌봄을 하면서) 나의 현재‧미래를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탈출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면서 “그러나 아동‧청소년기에 시작된 경우, 또래와 다른 가정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우울감, 부모의 역할 부재에 따른 불안감 등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말했다.

◇ ‘학교’의 의미

미서(18)는 현재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평일에 학교를 다녀오면 몸이 불편한 아빠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엄마 대신 네 명의 동생들을 돌보는 데 시간을 쓰곤 한다. 동생들이 잠들면 그제야 조리기능사 자격증 준비와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 작성을 시작한다.

미서가 학교를 졸업하고 당장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자 하는 데에는 돈의 영향이 크다. 당장 내년에 동생 세 명이 초‧중학교에 입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서는 밝은 모습을 잃지 않는다. 어릴적 엄마가 가게를 운영했던 기억을 따라 요리와 관련된 자격증을 취득해 창업을 꿈꾼다.

미서의 이야기는 가족돌봄청년이 아동‧청소년일 때 ‘학교’가 가진 중요성을 시사한다. 미서가 다니는 학교는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 중점학교인 데다가 사회복지사가 상주하고 있어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을 상대적으로 즉각 발굴하고 있다. 미서는 학교 사회복지사를 통해 자격증 취득 준비 비용, 학업에 매진할 수 있게 경제적 상황을 돕는 생계비 등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을 연계 받고 있다.

현장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가족돌봄청년에게 각종 지원을 연계해주기 위한 전문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그래픽=이주희 기자

현재 미서에게 각종 지원 사업을 연계해 주고 있는 학교 사회복지사는 전문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학교에 있다가 보면 아이들을 위해서 지원되는 것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낀다”면서도 “사례관리 전문성을 가진 교육복지사가 상주하면 꾸준한 사례 발굴 및 지원 연계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한 학교는 교사가 학생들을 교육까지 해야 해서 굉장히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제도와 지원 사업들을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하는데, 그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 전문 인력”이라면서 “복지 사각지대 학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학교 사회복지사 또는 교육복지사 등 전문성을 가진 인력이 전면 배치돼야 보편적 복지가 가능하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 “청년 본연의 지위와 권리 누릴 수 있도록”

가족돌봄청년과 관련된 보고서들에서는 학교와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보고한다. 잦은 결석, 과제 미제출, 불성실한 수업 태도를 보이는 학생이라면 학교 차원에서 가족을 돌보고 있는 아동‧청소년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교육부를 중심으로 학교를 통한 지원 방안 혹은 연계 경로 등을 담은 지침서를 제작‧배포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학교 밖 사례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학교 내에서 선제적으로 발굴되는 경우뿐만 아니라 수호‧수아의 사례처럼 이미 학교를 그만뒀거나, 채원 씨의 사례처럼 성인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영국은 ‘아동 및 가족법(The Children and Families Act 2014)’를 통해 지방정부가 반드시 지역 내 가족돌봄청년의 현황을 파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당 실태조사는 우선 아동‧청소년이 부적절한 돌봄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분별한다. 이후 가족돌봄청년으로 발굴된 경우, 각 개인에게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 해당 아동‧청소년에게 필요한 맞춤형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나를 위한 미래를 꿈꾸고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아동‧청소년기와 청년 시기에 응당 누려야 할 권리다. 그러나 가족돌봄청년에게는 이러한 기회가 당연하지 않다. / 그래픽=이주희 기자

이은주 교수는 “가족돌봄청년이 안고 있는 문제들은 사회복지 체계, 즉 공공의 복지 체계가 해야 하는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먼저 가족 돌봄의 부담을 완화한 뒤, 청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기 계발비 및 여가비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돌봄 서비스 체계가 (지금보다) 더 촘촘해야 하고, 그래서 지원받을 수 있는 자격 요건을 완화하는 등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서를 통해 만난 학교 사회복지사도 비슷한 부분을 강조한다. 그는 “소득분위로 경계선에 있는 아이들도 있고, 필요해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이를 세밀하게 살필 인력과 전문성이 필요하며, 일괄 지원은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이 학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학습비를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공부할 때 환자를 돌볼 사람이 없다면 실효성이 떨어진다”면서 “학생들을 대신해 아픈 가족을 돌봐줄 수 있는 방문 케어 서비스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가정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의 삶을 돌볼 수 없는 것은 동일하다는 의미다.

해외 영케어러(가족돌봄청년) 지원 제도의 핵심은 이들이 청소년 본연의 지위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여기에는 돌봄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충분하게 꿈꾸고 성장할 기회,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훈련의 기회를 보장받는 것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