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달콤한 비극, 씁쓸한 희극… 박찬욱의 또 하나의 걸작

2025-09-24     이영실 기자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극장가에 드디어 등판했다. / CJ ENM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에 만족하던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 분). 아내 미리(손예진 분), 두 아이, 반려견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만수는 회사로부터 돌연 해고 통보를 받는다.“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목이 잘려 나가는 듯한 충격에 괴로워하던 만수는 가족을 위해 석 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1년 넘게 마트에서 일하며 면접장을 전전하고 급기야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무작정 ‘문 제지’를 찾아가 필사적으로 이력서를 내밀지만, 선출(박희순 분) 반장 앞에서 굴욕만 당하고 ‘문 제지’의 자리가 누구보다 자신이 제격이라고 확신한 만수는 모종의 결심을 한다. “나를 위한 자리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서라도 취업에 성공하겠다.”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2022)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자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공식 초청,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국제 관객상 수상,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선정 등으로 개봉 전부터 국내외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드디어 관객과 만났다. 또 한 번 박찬욱만의 독보적 세계가 펼쳐지며 새로운 걸작의 탄생을 알린다.

‘어쩔수가없다’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회사원 만수가 덜컥 해고된 후 아내와 두 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THE AX(도끼)’를 원작으로 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만수 역을 맡은 이병헌(왼쪽). / CJ ENM

박찬욱 감독 특유의 치밀하고 아이러니한 연출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회 구조의 불합리를 블랙코미디적 시선으로 녹여내면서도 인물의 감정선은 날카롭고 섬세하게 짚어낸다. 특히 ‘어쩔수가없다’는 제목처럼, 개인의 의지로는 벗어나기 힘든 사회적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주거 불안, 고용 불안,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교차하며 공감할 만한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드라마를 넘어 현대 사회의 모순을 해부하는 ‘블랙미러’ 같은 장치로 기능한다.

스릴러적 긴장감과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의 무게감을 지니면서도 블랙코미디와 아이러니가 끊임없이 배치돼 지루할 틈이 없다. 이러한 장치들은 일상에서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불안과 위기의 순간을 극대화하고, 냉소적 유머와 풍자를 통해 웃음과 씁쓸함을 동시에 맛보게 한다. 결국 스크린 속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기에 더 깊이 와닿는다. 

디테일이 살아 있는 독창적 프로덕션은 작품의 밀도와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인물마다의 서사를 반영한 공간 구현 역시 인상적이다. 특히 만수의 집은 70~80년대 부유층 사이에서 유행했던 ‘불란서 주택’ 양식에 노출 콘크리트 기반의 브루탈리즘을 결합해 설계, 주인공의 복합적 내면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또 만수가 분재를 가꾸는 온실과 가족의 행복이 깃든 마당 정원은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미장센의 정수를 보여준다. 여기에 긴장과 유머를 오가는 다채로운 음악이 극의 감정선과 분위기를 한층 풍성하게 만든다.

호연을 펼친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손예진·이병헌·이성민·염혜란·차승원·박희순. / CJ ENM

‘공동경비구역 JSA’ ‘쓰리, 몬스터’에 이어 다시 박찬욱 감독의 선택을 받은 이병헌은 또 하나의 대표작이 될 만한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감독의 믿음, 관객의 기대에 제대로 화답한다. 삶에 대한 만족과 안정이 무너진 순간, 흔들리는 가장의 불안과 집착, 그리고 이를 지켜내려는 집요함을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그려내며 몰입을 이끈다. 여기에 블랙코미디 특유의 위트와 아이러니까지 능숙하게 소화하며 캐릭터의 입체감을 배가한다. 

위기에 맞서는 강인한 아내 미리 역의 손예진, ‘만수’가 동경하는 잘나가는 제지 회사 반장 선출 역의 박희순, 만수와 경쟁하게 되는 구직자 범모 역의 이성민, 범모의 아내 아라 역의 염혜란도 제 몫을 해내며 빈틈없는 연기 앙상블을 완성한다. 만수의 또 하나의 경쟁자이자 제지 업계의 잔뼈 굵은 실력자 시조로 분한 차승원도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남긴다. 

박찬욱 감독은 “관객이 질문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현대 한국 중산층의 삶에서 최저선은 어디인지. 어느 정도 삶을 영위해야 인간다운 삶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러니까 이 남자가 지키고 싶은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라고 연출 의도를 전하며 “전작의 유머가 은근했다면 ‘어쩔수가없다’에서는 좀 더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닝타임 139분, 오늘(2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