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한 남극, 쿨한 한국⑩] 기후의 모래시계: 사라지는 백사장
시사위크=이미정·정소현·김두완·박설민·권신구 기자 황금빛 모래가 깔린 백사장. 바닷가를 생각하면 쉽게 떠올리기 쉬운 이미지다. 백사장은 해변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해안방재와 생태계 유지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데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면서 우리 해안 곳곳에서 백사장이 사라지고 있다.
◇ 좁아지는 백사장… 바닷가 주민 안전 위협하다
“예전에는 해변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죠. 백사장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바다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백사장 면적이 많이 줄었어요.”
강원도 속초시 장사항 해변 인근에서 20년째 횟집을 운영 중인 김동진 씨는 지난달 2일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해변가 풍경이 수십 년 사이에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모래가 바닷물에 지속적으로 휩쓸려가면서 백사장 폭이 크게 줄었다는 설명이다.
백사장은 태풍 등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 1차적인 충격 흡수기능을 한다. 완충공간 역할을 하는 백사장 면적이 좁아지면 주민들은 침수 피해에 노출될 위험성이 높아진다.
장사해변 인근 상가 주민들은 태풍이 몰아칠 때, 적잖은 피해를 겪었다고 한다. 김씨는 “태풍 등으로 인해 파도가 치면 도로를 넘어 가게 앞까지 바닷물이 들이쳐 피해가 컸다”고 토로했다. 다만 “지금은 테트라포드를 설치하면서 그나마 피해가 덜해졌다”고 덧붙였다.
이날 취재진은 장사해변 백사장에 방파제 구조물인 테트라포드가 가득 쌓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테트라포드(Tetrapod)는 파도에너지를 흡수해 파랑을 감소시키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테트라포드 덕분에 바닷물이 들이치는 피해는 어느 정도 막고 있는 듯 보였다. 다만 백사장의 모래가 유실돼 발생하는 침식 현상까지 억제하진 못했다.
장사항 인근 해변은 백사장 모래가 꾸준히 유실되면서 침식 현상이 진행돼왔다. 해양수산부(이하 해수부)의 ‘연안침식 실태조사’에서 속초시 장사해변은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연안침식 우려 등급인 ‘C등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안 침식은 파도와 조류, 해류, 바람, 해수면 상승, 인공 시설물 설치, 해안 개발 등에 의해 연안의 지표가 깎이거나 모래 등이 유실되는 현상을 뜻한다. 연안은 육지와 바다가 맞닿아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 지역과 해역을 총칭한다. 해변, 갯벌, 만, 삼각주 등 다양한 지형적 환경으로 구성돼 있다.
국내 해안 10곳 중 4곳은 다소 심각한 연안침식 현상을 겪고 있다. 해수부가 올해 발표한 ‘2024년 연안침식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해안 364개 중 148개(40.7%)가 침식 우려(C등급) 또는 심각(D등급)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해수부는 매년 국내 해안에 대해 연안침식 실태를 조사한다. 해빈폭 변화, 단면적 변화, 침식 안정률, 국부침식, 배후지 취약정도를 살펴 침식정도를 4등급(A~D)으로 나눠 평가한다.
◇ 동해안, 연안침식 가장 심각… 아찔한 모래절벽 곳곳에
지난해 실태조사 결과, 동해안의 우심률(우려·심각 등급)은 61.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어 △서해안 32.3% △남해안 17.6% 순이었다.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과 이상 고파랑 증가, 인공 구조물 등으로 인해 국내 연안침식의 심각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동해안의 연안침식 우심률이 다른 해역보다 높은 것은 △지형적 특성(외해에 노출된 해안) △기후변화 △인위적 요인(인공구조물, 해안 개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됐다. 지난해엔 고파랑(높은 파도) 내습이 증가하면서 침식률이 전년보다 높아진 것으로 분석됐다.
동해안은 해안선을 따라 모래사장과 해안절벽이 넓게 발달돼 있는 해역이다. 높은 파도가 몰아치는 해안 특성상, 다른 해안보다 모래가 바닷물에 쓸려나가기 쉽다. 다만 그 강도가 자연적인 침식 수준을 넘어서면서 문제가 돼왔다. 모래가 과도하게 깎여 나가면서 백사장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찔한 모래절벽과 해안산책로 붕괴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8월, 취재진은 장사항 인근 해변을 포함해 강문해변·안목해변·남항진해변·동산해변 등 동해안 바닷가 곳곳을 탐방 취재했다. 연안정비 사업이 진행돼 나아진 해안도 있었지만 여전히 침식이 심각한 해안도 적지 않았다.
강릉시 남항진 해변은 탐방한 해변가 중 침식 상태가 가장 심각했다. 모래의 상당 부분이 파도에 쓸려나가면서 파도와 맞닿은 쪽엔 가파른 모래 절벽이 형성돼 있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모래절벽 높이는 아찔했다. 이날 피서객들은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 위해 가파른 모래절벽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
남항진 해변은 지난해 연안침식 실태조사에서 B등급을 받은 곳이다. 다만 현장에선 확인한 침식 상황은 지난해 실태조사 결과와는 다소 괴리가 있었다.
양양군에 위치한 동산해변은 모래가 지속적으로 유실되면서 백사장 면적이 좁아지고 있었다. 동산해변 인근에서 만난 주민 A씨(65)는 “예전엔 바다가 지금 보이는 것보다 더 멀리 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바다가 점점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동산해변은 지난해 기준 연안침식 ‘D등급’을 받은 해안이다. 연안침식 실태조사에 따르면 동산해변은 해빈(해변)폭이 꾸준히 감소해왔다. 지난해 관측 기준 평균 해빈폭은 전년 대비 17.9% 감소했다. 해수부는 동산해변에 대해 “일부 구간은 해빈폭이 좁고 급경사 해변으로 고파랑 내습 시 배후지 피해가 우려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계절적인 파향 변화에 의한 해빈폭과 단면적 감소로 침식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해변가 외에도 전국 해안 곳곳에선 침식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연안별로 침식이 발생하는 주요 원인은 조금씩 다르다. 지형적 특성 및 기후변화 등 자연적인 요인의 영향이 큰 경우도 있고, 인공구조물과 해안 개발 등 인위적인 요인에 의해 침식이 심화된 사례도 있다.
◇ 해수면 상승·이상기후… 해안침식 가속화
해안별 침식 주요 원인을 둘러싼 분석은 해수부, 학자, 환경단체별로 조금씩 의견차가 있다. 다만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는 부분이 존재한다.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우리나라의 연안침식 현상이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다.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는 전 세계 바다의 해수면을 끌어올리고 있다. 극지방의 빙하 융해 및 해수 열팽창 현상 심화로 1990년대 이후 해수면 상승 속도엔 가속도가 붙고 있다. 해수면이 상승하면 해안선이 육지 방향으로 후퇴하는 해안침식 발생 빈도가 높아질 수 있다. 여기에 온난화는 수온도 함께 끌어올리는 만큼 태풍의 세력을 강화시킨다. 이로 인해 높은 파도가 더 몰아칠 수 있어, 연안침식이 급격하게 진행될 수 있다.
김태윤 한국환경연구원 연구위원은 시사위크와의 전화인터뷰에서 “해수면 상승은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만큼 장기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며 “단기적으로 태풍 등 극한 기상현상이 침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기후변화 영향을 고려하면 연안관리에 다양한 대응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매년 연안침식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침식이 심한 곳에 대해선 연안정비사업을 진행한다. 다만 방파제, 호안, 돌제 등 인공구조물 중심의 대응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높다. 구조물 설치에 따른 해수 흐름 변동으로 2차 피해가 발생하거나, 재발우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침식 대응책을 넘어, 사전 예방 중심의 통합 관리 체계구축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연안침식은 단순히 모래사장이 사라지고 해안선이 짧아지는 문제가 아니다. 해양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넘어, 우리의 삶의 터전과 안전도 위협한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