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감기 ‘우울증’, 원인은 만성 스트레스
IBS, 만성 스트레스의 뇌 전전두엽 단백질 당 사슬 교란 기전 규명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 불릴 정도로 흔한 질병이다. 국내 우울증 환자도 최근 5년간 증가해 100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초기 우울증이 ‘고위험 우울증’으로 악화하기 전 진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원인이 분명치 않고 환자 본인도 우울증 발병 여부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러한 우울증의 치료와 진단에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발병기전을 국내 연구진이 밝혀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은 이창준 기억 및 교세포 연구단 연구팀이 만성 스트레스가 뇌 전전두엽에서 단백질에 붙은 당 사슬(당쇄)을 교란해 우울증을 유발하는 뇌 분자 기전을 규명했다고 2일 밝혔다. 이번 연구는 이창준 단장, 이보영 연구위원 연구팀이 공동 진행했다.
우울증은 심리적·환경적·유전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실제 치료제는 대부분 신경전달물질 조절에 집중돼있다. 그 중 세로토닌 조절 기반 항우울제가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하지만 효과를 보이는 환자가 절반에 그친다. 위장 장애나 불안 악화와 같은 부작용이 있다. 때문에 신경전달물질 중심의 접근을 넘어, 뇌 속 새로운 분자 기전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IBS 연구팀은 단백질의 기능과 안정성을 조절하는 ‘당쇄화(glycosylation)’에 주목했다. 당쇄화는 단백질에 작은 당 사슬이 붙어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바꾸는 과정이다. 암·바이러스 감염·퇴행성 질환 등 다양한 질환에서 중요한 분자 기전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중 ‘O-당쇄화(O-glycosylation)’는 세포 간 신호 전달과 신경 회로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관여한다.
연구팀은 먼저 고성능 질량분석기를 이용해 정상 생쥐의 뇌 9개 영역의 O-당쇄화 조성과 양상을 정밀 분석했다. 그 결과, 뇌 부위마다 서로 다른 당쇄화 특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만성 스트레스 모델 생쥐의 뇌를 정상 뇌와 비교 실험도 진행했다.
실험 결과, 전전두엽을 포함한 일부 영역에서 O-당쇄화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단백질에 붙은 당 사슬 말단에 시알산(sialic acid)이 덧붙어 안정성을 높이는 시알산화(sialylation)가 줄어들고, 이를 담당하는 당전이효소 ‘St3gal1’의 발현이 감소했다.
연구팀은 이 효소의 감소가 실제로 우울증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도 진행했다. 정상 생쥐와 스트레스 모델 생쥐의 전전두엽에서 효소 발현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실험 결과, 정상 생쥐의 전전두엽에 효소의 발현을 억제하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음에도 의욕 상실, 긴장 증가 등 우울증 증상이 나타났다.
반대로 스트레스 모델 생쥐의 전전두엽에서 효소의 발현을 증가시키자 우울증 증상이 완화되는 결과를 확인했다. 이는 St3gal1 효소의 감소가 우울증 증상을 직접 유발하고 조절하는 핵심 분자 요인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연구팀은 단백질 분석과 전기생리학적 신호 측정 실험에서는 St3gal1 감소에 따라 신경세포 연결 단백질인 뉴렉신2(NRXN2)의 당 사슬 구조가 불안정해졌다. 이에 뇌 회로의 균형을 유지하는 억제성 신경세포의 기능이 저하됐다. 즉, 작은 당 사슬의 변화가 뇌 회로의 연결과 균형을 담당하는 핵심 요소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감정 조절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 수 있음이 입증됐다.
이보영 연구위원은 “이번 연구는 뇌의 당쇄화 이상이 우울증 발병과 직접적으로 연결됨을 보여줬다”며 “신경전달물질 중심의 기존 접근을 넘어, 새로운 우울증 치료 및 진단 표적 발굴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준 연구단장은 “우울증은 사회적 부담이 큰 질환이지만 기존 치료제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며 “이번 성과는 우울증 치료뿐만 아니라 PTSD, 조현병 등 다른 정신질환 연구로 확장될 수 있어, 보다 광범위한 치료 전략 개발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 성과는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발간 다학제분야 대표 저널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10월 4일(한국시간) 온라인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