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 '에세이'] H에게-수영장이 되살린 추억

2025-10-30     김재필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척추관협착증과 척추디스크 치료에는 물속에서 걷는 게 도움이 된다고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동네 초등학교 수영장에 다니고 있네. 처음에는 수영복 차림으로 나보다 젊은 여성들이 많은 물속에 들어가는 게 부끄럽고 쑥스러웠어. 나를 빼곤 모든 사람이 아주 멋진 자세로 수영하는 걸 보고 기가 좀 꺾이기도 했지. 그래도 나는 수영을 즐기려고 온 게 아니라 허리 병 치료를 위해 온 것이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즐겁게 잘 적응하고 있네. 지금은 물속에서 매우 씩씩하게 잘 놀고 있어.

물속에 있는 50분 동안 주로 걷네. 그러다가 심심하면 어렸을 때처럼 자유롭게 헤엄을 치거나 수영장 천장을 보고 둥둥 떠 있기도 해. 허리가 좀 좋아지면 물안경도 사고, 교습도 받고, 잠수도 할 생각이야. 초등학교 다닐 때, 동무들과 3m가 넘는 깊은 물 속에 들어가 1분 정도 눈을 뜨고 진흙을 파면서 자주 놀았기 때문에 잠수에는 자신이 있거든.

살다 보면 키가 작아서 좋을 때도 많네. 수영장에서도 키가 작으니 가장 얕은 곳도 물이 목까지 차더군. 그래서 수영장 어디를 가도 온몸이 물에 잠겨. 실내 수영장은 처음이지만, 물속에 있으면 몸이 가볍고 편해져서 좋네. 쓸데없는 근심 걱정 다 사라지고, 허리가 아프다는 것도 잊을 때가 많아. 물과 신체가 하나가 되고, 몸이 물속에서 완전히 녹아버리는 거지. 엄마 배 속 양수에서 9개월 동안 부유했던 아주 까마득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야. 짧은 순간이지만 황홀하지. 그래서 물에 들어가면 나오기 싫을 때도 많아.

하지만 실내 수영장에서 걷고 헤엄치는 건 흐르는 강물에서 멱을 감고 놀았던 어렸을 때 비해 부족한 게 더 많아. 제일 아쉬운 건 물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다른 생명체가 보이지 않아. 어부림(魚付林)도 없고 물고기도 없고 모래도 없고 다슬기도 없어. 너무 투명해서 아래 바닥이 다 보이니 신비한 것도, 궁금한 것도 없어. 게다가 수영복을 입고 수영모를 써야 해서 답답해. 물속에서 몸에 뭔가를 걸치면 자유와 해방감이 반감되거든. 수영장에서는 또 지켜야 할 규칙들도 많아. 첫날에는 수영장 벽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정숙’이라는 글씨를 보고 깜짝 놀랐네. 물속에서 정숙해지라니… 이러니 저절로 어렸을 적 자유롭게 멱 감고 놀았던 고향의 옛 강물이 그리울 수밖에 없어.

이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내 고향은 강마을이었네. 남도의 큰 물줄기인 지석천과 영산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였어. 그래서 사시사철 강과 백사장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지. 여름이면 동무들과 함께 날마다 강에서 멱을 감고 놀았어. 물속에 들어가면 짓궂은 장난도 많이 쳤지. 심한 물싸움도 했고 서로 물도 많이 먹였지. 햇볕이 너무 뜨거우면 잠수해서 조개나 다슬기 같은 것들도 잡았어. 실내 수영장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야.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찌릿한 감각으로 남아 있는 것 중 하나는 물고기들과 함께 놀았던 추억이야. 강에서 알몸으로 멱을 감고 있으면 은어와 피라미 떼가 다가와 살짝 건드렸지. 발과 엉덩이와 배꼽을 콕콕 쪼았고, 좀 심할 때는 아직 작고 귀엽던 거시기까지 살짝 치고 달아났어. 지금 생각해 보면 반갑다는 물고기의 인사 방식이었던 것 같아. 함께 놀자고 슬쩍 건드려 본 거지.

언젠가 안도현 시인의 <중요한 곳>을 읽으면서 혼자 웃었네. 어렸을 적에 그런 경험을 한 게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 아직 물이 농약에 오염되지 않았던 시절 시골에서 살았던 많은 소년이 비슷한 경험을 했었던 거야.

모악산 박남준 시인,/ 여름 밤 가끔 깨 활딱 벗고는/ 버들치들 헤엄치는 계곡 둠벙에 물을 담근다 합니다/ 그러면 물속 버들치들이 허연 사타구니께로/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도 아니고, 한꺼번에/ 검게 일렁이는 낯선 물풀 속에/ 잠이라도 청하자는 건지 슬금슬금 다가온다 합니다/ 다가와서는 가운데 중요한 곳을/ 톡톡, 건드리다가 입으로 물어보다가 한다는데,/ 정말이지 아픈 듯 간지러운 듯/ 마음에 수박씨 박히는 듯 기분이 야릇하다는데,/ 마흔 중반 넘어 여태 장가도 안 든/ 박남준 시인도 중요한 곳을 알기는 아나봅니다/ 하기야 버들치들도 그곳이/ 중요한 곳이 아니면 왜 궁금했겠어요

‘깨 활딱 벗고’ 물속에 들어갔을 때 ‘중요한 곳’을 ‘톡톡’ 건드리는 물고기들과 놀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걸세. 물고기가 거시기를 건드릴 때 그 기분이 얼마나 야릇한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을 테니까. 뒤돌아보면, 그때가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던 것 같네. 행복과 불행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자연과 함께했던 행복한 날들의 연속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