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새벽배송 금지 논란, 기업과 정부 역할은 어디에
시사위크=김지영 기자 우리는 과실을 예상하고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문제로 이어지지는 않게 할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니면, 인적 과실에만 초점을 맞추다가 동일한 사고가 반복되게 만들 수도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제시 싱어의 책 ‘사고는 없다’의 일부다. 쿠팡 새벽배송 금지 논의가 공회전하는 요즘, 기자에게 이 문구가 와닿았다. 지난 10일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의 협력업체 소속 택배 노동자 오승용 씨가 심야 배송 업무 중 전신주를 들이받고 숨졌다. 오씨는 사고 전까지 하루 11시간 30분, 주 6일 고정 야간노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씨를 비롯한 택배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반복되자, 택배노조는 자정부터 오전 5시 초심야 노동 제한을 요구했다. 이에 한 워킹맘이 새벽배송 금지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청원을 올리는 등 소비자들의 우려가 확산됐다. 장 보기도 바쁜 현대인들은 일 외의 삶을 쿠팡에 일정 부분 의존하고 있기에 새벽배송 서비스에 대한 이런 관심과 걱정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논의는 서비스가 아니라 재해에 관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노동부 및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쿠팡과 자회사 쿠팡CLS의 평균 산업재해율은 5.9%로 집계됐다. 100명 중 6명 가까이 산업재해를 입은 셈이다. 전체 평균 재해율(0.66%)과 비교하면 8.9배에 달하는 수치다. 이렇다 보니 물류서비스의 혁신이라 평가받는 새벽배송이 사실은, “다른 데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2010년대 초중반 야마토운수·사가와큐빈 등 일본의 대형 택배사들이 ‘새벽배송’과 같은 서비스를 시행한 적이 있다. 대도시권을 중심으로 밤 10시 또는 11시까지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 7~8시까지 상품을 배송하는 ‘조조시간대 지정 배송’이다. 그러나 택배기사의 과로사·졸음운전으로 인한 사망이 반복되자 택배사들은 ‘서비스를 지속하면서 기사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2017년 6월을 기점으로 이 서비스를 폐지했다.
당시 일본에서도 수입 감소를 우려하는 택배기사들과 서비스를 계속 이용하길 원하는 소비자들의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택배사들은 배송 단가 인상으로 이를 해결하고, ‘느린 배송 서비스’를 옵션으로 도입해 소비자에게 할인 혜택을 제공했다. 정치권은 이 과정에서 ‘수입보다 생명이 먼저’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흐른 지금, 국내 논의에서 기업과 정부의 존재감은 미미하기만 하다. 특히 이번 사태에 중심에 선 쿠팡은 2010년 창사 이후 14년 동안의 적자를 이겨내고 국내 1위 사업자로 올라선 기업이다. 야마토운수는 ‘기사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서비스를 중지했다. 쿠팡은 기사들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새벽배송을 유지할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일까? 만약 새벽배송 폐지가 불가피하다면, 정치권은 소비자들에게 이를 납득시킬 의지와 역량이 있을까?
오는 28일 택배 사회적 대화기구 3차 회의를 통해 국회와 정부, 그리고 주요 택배사와 택배 노조가 ‘택배기사 과로사 방지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날 마련된 회의가 반복되는 사고를 막을 실마리가 되길 기대한다.